그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신(神)의 부름을 받은 비둘기’를 뜻했으나 그의 행적은 정녕 이와 거리가 멀었다.
유럽인들에게 ‘위대한 탐험가’는 인디오에겐 ‘땅과 양심(良心)의 약탈자’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그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수천만명을 헤아리던 인디오들은 불과 150년 만에 300만명으로 줄어들었으니.
콜럼버스가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싣고 파로스항을 떠난 게 1492년 8월 3일.
그가 탄 산타마리아호의 돛은 황금에 대한 탐욕으로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마르코 폴로가 말한 ‘지판구(일본)’와 ‘카타이(중국)’의 황금궁전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다의 돈키호테’는 책략에 능하였다.
그는 항해일지를 두 가지로 썼다. 하나는 진짜요, 다른 하나는 항해거리를 훨씬 줄여 선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언젠가 배가 추락할지 모른다는 선원들의 불안을 달래주고, 진짜 항로를 혼자만 알겠다는 연막이었다.
그해 10월 12일 마침내 바하마제도의 와틀링 섬에 도착한다. 미국인들이 축제로 기리는 이 ‘콜럼버스의 날’은 중남미인들에겐 ‘수난의 날’이자 ‘원주민 저항의 날’이기도 하니.
콜럼버스에게 이곳은 ‘검은 진주(노예)’의 보고(寶庫)였다. 그는 황금 채취가 여의치 않자 대신 원주민들을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그는 점점 잔학해져 갔다. 말을 듣지 않는 인디오들의 코와 귀를 잘랐다. 1500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이 그의 발목을 족쇄로 채워 본국으로 송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55세로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처음 발견하기는 한 것일까.
그는 항해를 떠날 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이 표시된 지도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콜럼버스에 훨씬 앞서 신대륙에 닿았던 중국 명대의 ‘항해왕’ 정화(鄭和)가 만든 것이었다.
하기야 신대륙은 저 아득한 빙하기 시절 아시아인들이 건너와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오래된 땅’이 아니던가.
유럽인들은 단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역사를 발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죄스러운 미성숙의 땅’(칸트)으로 오염시켰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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