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희망 불황’

  • 입력 2004년 8월 10일 19시 11분


1980년 암울했던 ‘서울의 봄’ 시절 작가 최인호는 ‘희망가’와 ‘우리 승리하리라’ 두 노래를 번갈아 부르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희망가’보다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라고 권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는 제목과는 달리 ‘절망가’에 가깝다. ‘우리 승리하리라’는 복음성가 ‘We shall overcome’을 번안한 노래다.

▷나환자 복지시설 ‘성(聖)라자로 마을’의 원장으로 30년 동안 헌신한 고(故) 이경재 신부(1926∼1998)는 1990년대 초 중국을 다녀온 뒤 “사회주의는 희망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어느 복지시설엔 고아는 17명인데 교사와 보모가 80여명이더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국인들이 옌볜(延邊) 등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보다 몇십년은 뒤졌다. 고구려 때 만주 일대가 다 우리 땅이었다”고 기염을 토할 때였다.

▷지금 우리 국민은 희망을 갖고 사는가. 이달 초의 한 조사에서 10명 중 7명은 “그렇지 못하다고 본다”고 했다. 이유는 경제 불황(36.2%) 정치 불안(36.1%) 순이었다.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책임은 대통령(41.7%) 여당(21.5%) 야당(11.8%) 순으로 크다는 응답이었다. 3명 중 1명은 ‘기회만 주어지면 이민 갈 의향이 있다’고 했다. 경제 불황보다 ‘희망 불황’이 더 심각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같은 시점 중국사회과학원이 실시한 조사에서 중국인의 18%는 “나는 이미 상류층”이라고 답했고 64%는 “나도 사회의 상층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희망을 표시했다. 중국이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는 진단이 틀려 보이지 않는 요즘의 두 나라 모습이다.

▷마오쩌둥(毛澤東) 고르바초프 덩샤오핑(鄧小平)을 풍자한 농담이 1990년대 중반 중국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했다. 마오는 좌측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했고, 고르비는 우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으며, 덩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다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쪽 깜빡이를 켜고 어느 쪽으로 회전하는 걸까. 아무튼 좌회전은 무늬만 ‘희망가’일 뿐 결코 ‘우리 승리하리라’가 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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