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나라 살림 거덜낼 건가

  • 입력 2004년 8월 11일 18시 44분


이 정부의 경제 실세들이 즐겨 하는 말이 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한 단기부양책은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국민들이 경기가 나빠 힘들다고 했을 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왔던 말이다.

말인즉 맞다. 단기부양책을 썼다가 경제를 망친 정권이 한둘이 아니다. 전임 김대중 정권의 카드정책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 정권이고 보면 ‘단기부양책 불가론’을 경제정책의 ‘금과옥조(金科玉條)’쯤으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

‘단기부양책 반대’의 기수는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다. 그는 “위기가 아닌 불경기일 뿐”이며 “과거 정부와는 달리 장기(長期)주의를 택하고 있다”고 한다. 하기야 노무현 대통령도 “시간에 쫓겨 단기부양책을 쓰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경기가 너무 나쁘다’거나 ‘불황이 심하다’는 주장을 하면 불안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으로 몰린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정치권이 ‘만사 제쳐놓고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고 하는데 ‘단기부양책 불가론’을 주장하던 경제 실세들은 묵묵부답이다. 여당에서 주장하는 재정확대 정책이 바로 단기부양책이 아니고 무엇인가.

언론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했을 때는 ‘단기부양책은 안 된다’고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사람들이 ‘부양책 옹호론자’로 생각을 바꾼 것인가. 아니면 경제 실세들도 경제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인가.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럽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부작용이 예상되는 부양책을 써야 할 정도로 갑자기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정부가 단기부양책을 써야 할 지경으로 경제를 방치했다고 해야 옳겠다. 정치권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정확대정책’과 ‘감세정책’을 거론하는 것은 적어도 ‘단기부양책 불가론’만을 고집하면서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는 학자 출신 경제 실세들보다는 현실을 정확히 보려고 노력한 점을 인정할 만하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경제 실세들이 경제위기를 인정한 것이라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진작 경제난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더라면 호미로 막을 수 있던 일을 이제야 뒤늦게 가래로 막는 셈이니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당장 부양책이 불가피하다면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좀 효과가 오래가는 방법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예컨대 기업 투자를 살리고 경쟁력을 높이는 방책을 마련하라는 말이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그렇게 비판하던 김대중 정권의 단기부양책을 그대로 베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청년 실업, 투자 부진, 신용불량 사태 등 해결해야 할 경제문제가 한둘이 아니고 나랏빚이 200조원을 넘는 처지에 경기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수조원의 빚을 더 늘린다면 나라 살림이 어찌 되겠는가.

김영삼 정권은 은행과 기업을 망하게 하고, 김대중 정권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해 서민경제를 파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나마 멀쩡하게 남은 것은 나라 살림뿐이다. 노무현 정권은 나라 살림마저 빚더미 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경제의 3대 주체가 모두 망가지면 희망은 없다.

박영균 경제부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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