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270년 삼별초, 진도 상륙

  • 입력 2004년 8월 18일 18시 52분


고려의 또 하나의 고려 ‘삼별초 정부’.

반몽(反蒙) 30년 항쟁의 전위(前衛)에 섰던 삼별초. 그 삼별초가 ‘텃밭’인 강화를 떠나 목포 앞바다 진도에 닻을 내린 게 고려 원종 11년(1270년) 8월 19일.

주화(主和)로 돌아선 고려 조정이 몽골의 뜻을 좇아 개경으로 환도한 게 두어 달 전이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원종은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고 그 명부를 압수했다. 그게 몽골군의 손에 들어가면 영락없이 ‘살생부(殺生簿)’가 될 판이었다.

이에 배중손 등이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하고 난을 일으키니 ‘삼별초의 난’이다.

삼별초의 ‘진도 천도(遷都)’에는 배 1000여척이 따랐다. 배중손은 새로운 고려왕국을 꿈꾸었다. 반(反)외세, 자주의 기치를 내걸었다.

다도해의 물목 진도는 군사요충지요 옥주(沃州)였다. 영호남의 세곡(稅穀)이 조운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이었다. 새 행정수도(?)로 맞춤이었다.

고려의 정통임을 자처했던 ‘삼별초 정부’의 초기 활동은 왕성했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30여개 도서를 지배했다.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거제 장흥 나주 등 전라 경상 연안 일대를 ‘휘하’에 두었다.

삼별초는 끊임없이 내륙으로 진출을 시도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대몽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민심은 삼별초에 있었다. 삼별초는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백성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 남도(南道) 각처의 농민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1271년 5월 진도는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그 ‘맑고 순한 땅’은 처절하게 유린되었다.

몰살당한 장정들의 피가 내를 이루었으니 ‘핏기내’라는 지명이 아직도 전한다. 남정네의 씨가 말라 진도 여인네는 ‘일인(一人) 상여’를 메고 지아비를 장사지냈다고 하니.

그 뒤로도 진도는 오래 ‘공도(空島)’로 남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몽골로 끌려가거나 유랑(流浪)의 세월을 살았다. 그래선가. 진도의 ‘소리’엔 한(恨)이 스며 있다.

하나 물정 모르는 시인은 이렇게 읊는다.

“진도는 정이 흐르는 흙이요, 물이요, 산이요, 들이요, 개울이요…정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싸인 섬이더라….”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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