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만 해도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돌기가 솟고, 발바닥 손바닥에 떠오르는 장미꽃 형상…. 분명 발진 흔적이다. 마침내 의사는 말한다. “매독이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금지된 공포! 나는 문둥이처럼 모습을 감출 것이다. 끔찍한 통증과 뼛속 깊이 피어나는 신열, 눈알을 덮쳐 오는 짙은 어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공포다. 이 모든 고통은 언제쯤 끝이 날까? 이 세계는 나로 인해 폭발하리라. 누군가를, 아니 나 자신을 죽이게 될까 무섭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거울 속 저 사내는 누구인가?’(‘매독의 초상’ 편에서)
1490년대 유럽에서는 듣도 보도 못하던 새로운 병으로 난리법석이났다. 원인도 모를 병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폭발적으로 번지고 환자들은 흉측한 몰골로 변해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 다름 아닌 ‘매독’이었다.
지금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매독은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를 휩쓴 질병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에이즈에 비할 수 있을까(매독이나 에이즈나 ‘쾌락이 주는 전염’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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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역사학자 데버러 헤이든은 ‘매독’이라는 질병을 문화를 읽는 코드로 삼았다. 그녀는 매독을 앓았던 예술가 철학자 정치인 등 세계사의 주인공 14명을 통해 이 병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복잡한 것인지 출판된 자료들을 분석하고 종합해 생생하게 추적한다.
베토벤은 ‘환희의 송가’를 작곡할 때 매독 합병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고흐와 링컨, 히틀러, 슈만,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도 매독 환자였다. 철학자 니체가 스위스 바젤에서 정신착란과 전신마비 증세를 보였을 때 진료 의사는 그가 매독에 감염돼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저자가 전하려는 것은 이런 유명한 사람들이 매독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매독을 앓았던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린 병적인 본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예술과 사상을 깊이 읽어 보자는 취지다.
매독은 끔찍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은둔자의 병’이라는 특성 때문에 환자에게 내면으로의 침잠을 강요했다고 한다. 투병기간은 대부분 지옥이었지만, 치열한 내면성찰이 가져다 주는 ‘정신적 증상’ 때문에 때로 ‘전기에 충전된 듯 환희에 찬 에너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최고의 지도자, 천재적 예술인, 신의 예언자 등으로 일컬어졌던 세계사 속의 인물들이 병에 걸려 고통 받으면서도 불멸의 영감을 얻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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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이 단편소설의 귀재가 된 것도 ‘앞뒤로 돌진하는 무수히 많은 나선형의 매독균’이 뇌세포에 엄청난 자극을 준 결과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실제로, 모파상은 당당하게 환자임을 밝히며 창작에 정열을 쏟았다.
“이 책은 질병 이야기가 아니라 질병을 통한 개개인의 고통과 작품에 관한 기록이다. 위대한 사람들이란 어쩌면 우리에게 ‘(위대하다고) 강요된 존재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다름 아닌 매독이라는 병을 통해 불멸을 얻은 파우스트의 자식들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번역자의 말)
원제 ‘Pox’(2003년).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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