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녹두장군 전봉준(1854∼1894)일 것이다. 역사적 소양이 좀 더 깊다면 손화중(1853∼1895)이나 김개남(1853∼1894)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김인배라는 인물은 영 낯설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한국사이야기’(22권)를 완간한 뚝심의 역사학자 이이화씨와 역시 역사대중화에 앞장서 온 우윤 전주역사박물관장이 공동집필한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이름 한 줄 남기고 스러져 간 젊은 동학도의 생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110년 전의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김인배(1870∼1894)는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그의 직함은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접주는 일군의 동학도를 이끄는 최고책임자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영호대접주는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의 최고지도자라는 뜻이다. 스물다섯 젊은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창한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실제 그는 1894년 3월 20일 전북 고부에서 봉기해 전주와 공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해 간 동학농민군의 후방이었던 순천과 여수, 광양, 하동 지역에서 관군세력을 제압하고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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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1만명이나 되는 농민군을 이끌고 남해안 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였던 김인배는 그해 11월 말 전봉준의 주력군이 우금치에서 패퇴한 뒤에도 최후까지 전투를 벌이다 12월 7일 붙잡혀 죽음을 맞았다.
저자들은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文)’과 ‘동학사’,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등 관련 사료를 씨줄로 삼고 김인배의 증손자 김영중 등의 생생한 증언을 날줄로 삼아 그의 생을 추적해 간다. 그러고도 부족한 공백은 꼼꼼한 현장답사와 치밀한 상상력으로 메워 간다.
김해 김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김인배의 고향은 전북 김제평야를 내려다보는 봉서마을(현재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이다. 이곳은 전봉준의 어릴 적 고향 황새마을(정읍시 감곡면 계봉리)에서 직선거리로 3km 떨어진 곳이고 훗날 전봉준의 총참모를 맡았던 김덕명의 고향인 원평 거야마을이나 김개남의 고향 지금실마을과도 같은 생활권이었다.
동학교리에 보다 충실하려 했던 최시형과 손병희의 북접(北接)과 달리 동학을 척왜양(斥倭洋)의 민중운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남접(南接)의 지도층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이들 남접의 지도자들과 공동운명체로 묶여 있던 김인배의 독자적 활약이 펼쳐지는 것은 1894년 5월 7일 농민군과 관군간에 전주화약이 맺어지면서부터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이후 전라도 일대 고을들을 차례로 장악해 가며 군현별 행정기구였던 집강소를 통해 반봉건운동에 모아진다.
전라좌도를 책임진 김개남의 휘하에 있던 김인배는 순천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호남과 영남의 농민을 하나로 묶어 간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전쟁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로 다른 지역을 연합한 농민 조직을 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을 펼칠 때의 문제의식은 유복한 양반 집안에 태어나 상투를 줄로 묶어 천장에 매달고 글을 읽다가 혁명의 물결에 몸을 내던진 주인공이 과연 어떻게 살았는가 아니, 죽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얻은 깨달음은 그가 왜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시대에 대한 폭넓은 통찰이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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