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이나 경험이 아니라 사고력만으로 인생 문제를 논하는 것이 내 소설의 궁극 주제’라고 밝혀 온 배수아의 신작이다. 그동안 고독하고 비정상적인 삶들을 ‘쿨한’ 글쓰기로 다뤄 온 작가가 이제 스스로 고독과 관념의 세계로 걸어간 듯 내면의 투쟁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계간 ‘문학·판’에 2003년 겨울호부터 2004년 여름호까지 연재된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후반 서울의 한 대학. 주인공 ‘나’는 논리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신입생으로 교양영어 수업을 영문과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수업은 절망적이다. 지성으로 가득 찬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학문의 전당을 꿈꿨던 ‘나’에게 대학은 눈뜨고 볼 수 없는 광대마당이었다.
그런 그에게 영문학도 S는 구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S는 비할 바 없이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번역문장을 구사할 줄 알았고, 남들이 자신의 뛰어남을 칭찬해 주지 않고 오히려 비웃어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학생이었다. ‘나’는 S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강인함, 독창성에 점점 끌려 영혼의 동반자가 된다. 환멸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대학에서 S는 그의 유일한 정신적 동지였다.
‘나’는 점점 책 속으로만 빠져 들어갔고, S 이외의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었다. 어느 날 S는 ‘나’에게 자신의 친척인 P교수를 소개한다. 후에 P교수는 ‘나’에게 진정 학문하는 사람의 숭고함을 보여 준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그의 부고를 받게 되고, 그가 즐겨 쓰던 퍼스널 컴퓨터를 유품으로 물려받는다. P교수의 죽음은 S와 ‘나’ 모두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을 안겨 준다.
‘나’와 S의 관계는 S가 한 여대생을 사랑하면서 끊어진다. ‘나’는 그 무엇도 기대할 것이 없는 대학을 떠나 자신만의 대학에서 마흔 살까지 오로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고독한 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제목대로 ‘독학자’가 된 것이다.
작가는 1월에 펴낸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이어 이번에도 ‘줄거리’를 버린 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보여 준다. ‘대학교’로 상징되는 제도와 권위, 부조리, 이상적 진리와 영혼의 자유를 향한 주인공의 내적 투쟁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다.
점점 더 불편하고 낯설고 거친 글쓰기를 선택한 듯한 작가가 대중과 어떻게 호흡을 맞출지 궁금하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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