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9월 3일. 23세의 미국 인쇄업자 벤저민 데이가 ‘뉴욕 선’지(紙)를 창간했다.
데이는 당시 비싼 물건(?)이었던 신문 값을 6센트에서 1센트로 낮추었다. 혁명적인 ‘가격 파괴’였다.
동전 한 닢(1센트)에 신문 한 부! ‘페니 신문(penny press)’이 출현한 것이다.
이 네 쪽짜리 신문은 더 이상 중산층과 식자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마부도 짐꾼도 신문을 기웃거렸다. 성(性)과 범죄, 스캔들과 가십은 아침 식탁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기사 조작(造作)’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보(誤報)와 ‘조작(造作) 기사’가 난무했다.
“천문학자 존 허셸이 달에서 날개가 달린 생명체의 존재를 관측했다. 달에는 숲과 호수, 사파이어로 쌓아올린 신전이 있다….”
이 전대미문의 특종은 길이길이 잊혀지지 않는 추문(醜聞)이 되었으나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신문은 창간 5개월 만에 5000부를 찍어 ‘뉴욕 최대’를 기록했다. 그 3년 뒤에는 1만9000부를 발행해 ‘세계 최대’였던 런던의 더 타임스를 따돌린다.
19세기 중반까지 ‘미니(mini) 미디어’에 불과했던 신문이 마침내 ‘매스(mass) 미디어’로 떠올랐다.
뉴욕 선의 성공에 자극받아 미국과 유럽에서 페니 신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페니 신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상업성과 대중성 때문에 신문의 당파성에서 해방되었다.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불편부당해야 했으니 상업성은 신문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켰다.
비리를 폭로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상업성은 비판정신을 이끌어냈다.
바야흐로 언론자유의 기운이 뻗치고 있었다. “모든 주의와 주장이 이 땅 위에서 자유로이 피어나게 하라!”
그러나 페니 신문의 치열한 부수 경쟁은 상업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황색 저널리즘’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1950년 종간된 뉴욕 선은 2002년 같은 제호로 재창간(再創刊)된다.
신(新)보수주의의 깃발을 내건 신문은 ‘안티 뉴욕 타임스’를 표방하고 있다.
뉴욕 선은 1847년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했을 때 이미 이런 사설을 썼다. “우리의 승리는 멕시코에 자유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안겨줄 것이다….”
왠지 귀에 익지 않은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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