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다’…선비의 죽비소리

  • 입력 2004년 9월 3일 16시 50분


중종 때 도학정치를 앞세워 사림의 개혁을 단행하려다 좌절한 조광조. 그림 박순철
중종 때 도학정치를 앞세워 사림의 개혁을 단행하려다 좌절한 조광조. 그림 박순철
◇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다/김태완 풀어씀/504쪽 2만원 소나무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1611년 조선의 군주 광해군은 과거의 최종합격자 33인에게 책문(策問)을 출제하며 이처럼 절절한 자세로 묻는다. 인재등용, 세제개혁, 토지정비, 호적정리 등의 문제에 있어 임진왜란 이후 살아남은 백성을 소생시키기 위해 시급하게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 것이다.

서른다섯살의 유생 임숙영은 답한다. “왜 스스로의 실책과 국가의 허물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느냐”고. 그는 “왕비와 후궁의 권력 개입을 묵인하고, 뇌물을 통해 벼슬자리에 나서는 것을 용인하며, 임금의 허물을 비판하는 언로(言路)를 탄압하는 것이야말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직언한다.

이 글은 조선조 최고의 현실주의 외교를 펼쳤지만 내정에 실패했던 광해군의 약점을 통렬히 지적한다. 서자의 신분으로 정통성이 약했던 광해군은 권력에서 소외됐던 북인을 대거 기용하며 개혁을 표방했지만 후궁과 북인세력이 결탁한 ‘코드인사’, 국가재정 마련을 위한 매관매직, 이를 비판하는 언관에 대한 탄압 등으로 자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광해군도 그처럼 몸을 낮춰 질문을 던졌지만 막상 임숙영의 답을 읽고는 크게 노해 합격자 명단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라고 명한다. 좌의정 이항복과 영의정 이덕형 등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 나서 그 부당함을 지적한 끝에 무려 4개월을 끌었던 이 삭과파동은 결국 ‘향후 질문요지에서 벗어난 답을 한 자는 과거에 선발하지 말라’는 임금의 교시와 함께 무마된다.

조선시대 과거는 예비고사 성격의 소과와 본고사격인 대과로 나뉜다. 소과는 사서오경의 지식을 평가하는 생원시와 시(詩) 부(賦) 등으로 문장력을 평가하는 진사시가 있다. 이에 합격한 진사와 생원들에게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 대과는 보통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그리고 전시(殿試)의 3단계로 이뤄진다. 과거급제는 초시를 거쳐 복시까지 합격한 경우를 말한다. 책문은 이 최종합격자(보통 33명)의 성적을 가리기 위해 임금이 주재하는 전시에서 출제되는 문제다. 임금이 직접 출제하는 책문은 당대의 국가과제에 대한 방책을 묻는 질문이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가적 고민을 담은 책문 13건과 명신(名臣)들의 대책(對策) 15건을 한글로 풀고 해설을 달았다. 물론 그 대책은 도와 덕의 실현이라는 유교적 형이상학에 기초해 있지만 그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보편적 울림을 갖는다.

조선의 과거제가 단지 고전에 대한 상식과 글짓기 솜씨로 인재를 선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과 임숙영의 예에서 드러나듯 거기에는 국가를 책임진 통치자의 현실적 고뇌와 젊은 인재들의 목숨을 건 치열함이 녹아 있다.

1515년 중종은 과거급제자들에게 “그대가 공자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정치를 펼치겠는가”라는 취지의 책문을 내린다. 이 책문을 받은 급제자 중에는 훗날 도학정치 개혁에 나서게 되는 조광조가 있었다. 그는 “공자가 나라를 다스린 방법은 ‘도를 밝히는 것’이고, 학문으로 삼은 것은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뿐이었다”는 글로 자신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1447년 세종 29년 나란히 과거에 급제했으나 훗날 ‘만고의 충신’과 ‘실리주의자’로 평가가 엇갈리게 되는 성삼문과 신숙주. ‘아무리 좋은 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폐단에 빠지는 것을 막을 대책’을 묻는 세종의 질문에 두 사람의 답은 갈린다. 성삼문은 “마음이 근본이고 법은 도구다”라며 군주의 마음에 달렸다고 답하고, 신숙주는 “인재를 얻어서 일을 맡기기에 달렸다”고 답한다. 군주 중심의 충(忠)과 신하 중심의 용(用)을 강조한 답에 이미 두 사람의 운명이 예고된 것은 아닐까.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왕은 절박하게 물었고 젊은 인재들은 목숨을 걸고 답했다▼

문:“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고?”

답:“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입니다.”

문:“섣달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고?”

답:“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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