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이후…무너진 중산층]<1>6년간의 인생유전

  • 입력 2004년 9월 5일 18시 47분


《“깨지기 쉬운 유리병 같은 것이 중산층의 삶입니다. 다만 자신에게 현실로 닥치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할 뿐이죠.”(박선철 전 동화은행 노조위원장) 동화은행 직원들의 6년간 삶의 행로는 ‘극과 극’이다. 퇴출 직후 각 금융기관에서 은행 재직 시절에 진 빚을 갚을 것을 요구받고, 자력으로 또는 부모나 형제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느냐 여부에 따라 첫 갈림길이 결정됐다. 주택 관련 대출, 우리사주용 대출, 보증 등으로 부채가 많은 28∼35세의 젊은 직원 중 상당수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비정규직을 떠돌면서 ‘제2의 삶’을 모색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소득이 6년 전에 비해 떨어진 직원이 65.5%에 이르고 62명이 자영업에 도전했지만 성공한 직원은 7명(11.3%)에 불과하다.》

▽중산층에서 신(新)빈곤층으로=본점 자금부 대리였던 황규영씨(40). “은행에 다닐 때 신용불량자를 보면 ‘얼마나 못났으면 저렇게 될까’ 생각했죠. 이제는 제가 신불자입니다.”

그는 5월 자신이 운영하던 휴대전화 액세서리 생산업체가 부도가 났다. 두 달 전부터 서울의 한 일식집에서 접시를 닦고 있다. 월급은 60만원.

황씨처럼 연수입이 1380만원 이하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45명. 이 중 직업이 없는 20명은 대부분 자영업이나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경우. 지점장 출신인 최모씨(55)는 옷가게, 갈비집, 노래방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10억원의 재산을 모두 날렸다. “사업을 위해 4억원에 처분한 강남의 50평형대 아파트만 가지고 있었어도 재산이 두 배로 늘었을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16명의 자영업자나 개인사업자들도 부도 직전 상태. 주위에서 “깡패가 다 됐다”는 소리까지 들어 가며 경기 부천시에서 노래방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던 박모씨(44). 1년반 전에 노래방을 내놨는데도 팔리지 않아 빚만 3억원이 넘게 쌓였다.

하루벌이가 안되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극한상황에 이른 비정규직도 9명이다. 대리운전이나 막노동으로 끼니를 잇는 이들도 있다.

▽위기의 중하층=행원 부부였다가 모두 퇴출된 김모씨(40) 부부. 은행 콜센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부인과 의류 땡처리 회사에서 일하는 김씨의 월급을 합쳐서 한 달 소득은 200만원.

김씨는 정식직원이 아니다. 보증으로 생긴 빚 4000만원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기 때문에 정식으로 취업을 하면 월급에 압류가 들어온다. 휴대전화도 부인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 한때 서울 강남구 신사역 부근에서 포장마차를 했지만 심한 허리 디스크가 생겨 포기했다.

105명의 중하위 계층 대부분은 김씨와 비슷한 처지로 현재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최근의 내수불황은 하강 압력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들 중 6년 전에 비해 재산이 감소한 사람이 93명. 재산이 아예 없고 빚만 있는 사람도 18명이나 된다.

중하위 계층에서 비정규직 종사자는 61명. 퇴출 직후 신용불량자가 돼 줄곧 저임금의 비정규직에 근무하거나 식당, 오락실, 문방구점, 미장원, 영세학원 등 자영업에 실패한 뒤 비정규직으로 건너온 이들이다. 채권추심, 카드사, 다단계판매 등 실적에 따라 월급을 받는 직종이 대부분이다. 정규직도 27명이지만 대부분 임금이 낮고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한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현상 유지=은행원 시절보다는 못하지만 중산층의 삶을 유지한 47명 중 정규직은 27명. 이들은 퇴출 당시 부채가 적었거나 부모나 형제의 도움으로 부채를 갚아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았으며 재취업에도 성공했다. 증권사나 카드사, 캐피털 등 금융회사나 IBM, 삼성SDS 등 대기업 및 탄탄한 벤처기업으로 옮겼다. 이 중 4명은 다시 경찰, 소방서, 공기업 직원 등 임금은 다소 적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다시 얻었다.

비정규직 11명은 대부분 전산부에 근무했던 직원들로 정보기술(IT)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자영업이나 개인사업을 하는 9명은 불경기를 맞아 다소 불안정한 상태다.

▽향상 그룹=지점장 출신인 정모씨(49)는 퇴출 후 바로 증권회사로 옮겼고 이사까지 승진했다. 정씨처럼 정규직으로의 재취업이 순조로웠고 승진도 거듭한 사람은 18명에 이른다. 은행 근무 시절 쌓은 금융이나 IT 관련 노하우로 높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 3명이다. 이들 중에는 부동산 값 상승으로 재산을 크게 늘린 이도 있다.

채권추심회사나 전산아웃소싱업체를 차려서 성공하거나 자영업을 일군 사람도 11명에 이른다. 직업도 없이 고생하다가 맨주먹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무역업과 식당으로 성공한 원용주씨(48)는 인생 역전의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별취재팀

▼빚쟁이 피해 잠적…막노동 떠돌기도▼

본보가 퇴출 당시 동화은행 노조가 갖고 있던 명부와 지난해 이들이 새로 만든 주소록을 대조해 본 결과 당시 임직원 중 400여명은 현재 소재 파악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우선 사망자가 7명 있다. 사고와 질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지만 자살한 사람도 있다. 지점장 출신 A씨는 주변 친지와 동료 행원들의 돈을 끌어모아 사채업을 시작했다가 부실채권 회수가 되지 않아 부도가 나자 3년 전 끝내 자살을 택했다. 지인들에 따르면 A씨의 부인은 그 사건 이후 강남의 아파트 상가 사무실 청소용역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캐나다 호주 미국 등으로의 이민자도 30여명 있다. 캐나다에 갔다가 최근 다시 한국으로 역(逆)이민 온 정석기씨(44·본점 카드사업부 근무)는 “특별히 잘되거나 망한 사람들 이야기는 못 들었다”며 “본인 비자는 잘 나왔는데 가족들 비자가 나오지 않아 혼자 1년반 정도 미국에서 허송세월한 사람도 있는 등 초기에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은 많다”고 말했다.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은 대부분 극도의 궁핍함으로 사회생활이 어려운 사람이거나 어쩔 수 없이 빚을 연대보증인인 동료에게 떠밀고 자취를 감춘 사람들.

본점 총무부에 근무했던 고기엽씨(44)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동료가 얼마전 5만원만 줄 수 없겠느냐고 전화해 왔다. 막노동으로 힘겹게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송금해 줬다. 나도 퇴출 이후 자동차 광택 내는 일까지 해 봤는데 어떻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겠나”라고 말했다.

▼한보 부도에 치명타…1500명 실직▼

퇴출 소식이 알려진 1998년 6월 29일, 동화은행 노조원이 ‘정부 결정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격문을 당시 서울 세종로 본점 농성장에 붙이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동화은행은 1989년 1월 이북 5도민 80만명이 2000억원을 출자해 만든 후발 시중은행이다.

‘제2의 신한은행 신화를 만들어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창업 사원을 모집할 당시 시중은행 행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급여수준이 시중은행권 최고 수준으로, 같은 직급이라도 다른 시중은행보다 20%가량 많았다.

1994년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 81개 점포를 낼 정도로 급성장했으나 97년 이후 한보철강 진로 미도파 등 거래 기업들이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급속히 부실화됐다.

결국 98년 6월 29일 동남 대동 충청 경기은행과 함께 퇴출은행으로 선정돼 신한은행에 부채자산인수(P&A·고용 승계 없이 우량자산과 부채만 인수) 방식으로 넘겨졌다. 1831명의 직원 가운데 300여명은 신한은행으로 옮겨갔고 나머지는 뿔뿔이 생업전선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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