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고 싶지 않은 문화혁명▼
2002년 정치판을 뒤흔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에 대해서도 문화혁명의 전위대인 홍위병처럼 보는 일각의 시각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동호인단체가 정치조직화한 것쯤으로 여기며 “설마…” 하는 사람들이 보다 더 많았다.
“설마…”가 “글쎄…”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권세력의 거친 이념공세가 계속되면서 문화혁명적 현상이라는 말을 실감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치권 스스로 ‘정변’ 또는 ‘쿠데타’라고 표현한 탄핵정국이 고비였다. 올봄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의 함성에 묻혀 제도권 정치가 무력화되자 중도 성향의 사람들조차 적잖게 동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어쩌면…”이라며 우려하기 시작했다. 4·15총선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한 여권의 집요한 과거사 공세가 불안감을 한층 자극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과거사 공세와 이념 공세는 표리 관계에 있다. 이른바 대중독재 논쟁도 이 같은 기류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40년 전의 중국을 떠올릴수록 자꾸 오늘의 한국을 돌아보게 되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하나, 문화혁명의 발단이다. 10년 재앙의 불을 댕긴 것은 역사논쟁이었다. 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없다는 모토하에 심지어 공자(孔子) 비판운동으로까지 치달았다. 공자 유적지는 홍위병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둘, 시대적 배경이다. 중국은 1960년대 초 잇단 경제정책의 실패로 혹독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3년 내리 가뭄이 들어 3000만명이 굶어죽기도 했다. ‘7년 안에 영국을 능가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자’는 당시 구호가 더욱 참담하게 느껴진다.
셋, 주도 세력이다. 문화혁명은 다름 아닌 집권세력이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마오쩌둥은 1966년 베이징에서 열린 홍위병 집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기도 했다.
넷, 방법과 양태다. 문화혁명은 ‘권력의 난(亂)’이었는데도 관료조직이 아니라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젊은이들이 앞장섰다. 이들은 “혼돈은 좋은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지도자의 말에 따라 거슬리는 것은 마구 두들겨 부쉈다.
다섯, 동기와 의도다. 문화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는 난정(亂政)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린 마오쩌둥이 정적을 제거하고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천하가 대란(大亂) 상태에 빠져야 대치(大治)를 이룰 수 있다”고 한 그는 결국 자신이 의도한 대로 권력을 독점했다.
문화혁명기의 중국과 현재의 한국은 유사점이 없지 않지만 환경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어쩌면…”은 기우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문화혁명의 끔찍한 폐해는 아예 상기하고 싶지도 않다.
▼선동과 투쟁의 어두운 그림자▼
그런데도 요즘 문화혁명을 거론하는 사람이 늘어 꺼림칙하다. 한 법조인의 얘기가 특히 섬뜩하다. “과거사 논쟁을 보면서 ‘허삼관 매혈기’라는 중국 소설을 생각했다. 매혈로 어려운 시절을 버텨 온 한 사내의 처가 문화혁명 때 가족비판대회에서 큰아들은 남편의 친자식이 아님을 고백해야 하는 비정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최근 국가보안법 논쟁도 법 논쟁의 차원을 벗어났다고 말했다. 여권이 헌법기관의 의견조차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바탕에는 선동과 투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것이었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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