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세도세자의 묘소를 옮겨왔으니 선산(先山)이 있는 이곳은 그의 고향과도 같았다. 화성은 정조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화성은 근대적 신도시였다. 18세기 말 첨단의 시범도시였다.
실학(實學)의 실험장이었고 그 결정체였다. 정조의 통치이념인 ‘작성지화(作成之化·만들어냄으로써 발전을 꾀함)’의 체현이었다.
산성(山城)과 평지성(平地城)의 이분법을 넘어선 새로운 개념의 성곽을 쌓았다. 공사에 동원된 거중기(擧重機)는 신기술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화성 신도시는 그 변화에의 열망이었다. 깨어나기 시작한 조선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진경(眞景)시대를 이끌었던 정조.
사도세자의 천장(遷葬)은 단지 효심 때문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것, 그것은 왕권에의 복속(服屬)을 뜻했다. 사도세자의 허물을 벗겨내는 것, 그것은 정치판의 대대적인 물갈이로 이어진다.
천장은 정조 재위 13년 만에야 이루어졌으니 그의 정치실험은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야 했다.
정조는 왜 화성신도시를 건설했을까.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이 대규모 역사(役事)를 벌였을까. 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던 그가?
“호위(護衛)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정조실록)
윤행임도 비문(碑文)에 “화성을 쌓는 데는 ‘은근한 의도’가 있어 초당을 ‘노래당(老來堂)’, 정자를 ‘미로한정(未老閑亭)’이라 이름 붙였다”고 썼다.
재야사학자 이이화는 “‘늙어서 살 집’과 ‘늙지 않아서 한가롭게 노닐 정자’는 그 자신이 여기 와서 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풀이한다.
왕도(王都)를 옮기고자 함이었다! 천도(遷都)를 위한 정치공작이었다!
“화성으로 천도하는 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한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수구세력들은 몸을 떨었다.
기득권 세력과 결별하고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 화성에는 그 정치적 야망과 웅지(雄志)가 꿈틀대고 있었다. 왕도정치의 꿈과 이상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未完)의 역사로 남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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