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위기경보

  • 입력 2004년 9월 9일 18시 40분


‘들어가서, 가만히 있되, TV나 라디오에 따르세요(Go in, stay in, tune in).’ 영국 정부가 테러나 자연재해에 대비해 지난달 집집마다 나눠준 ‘위기대처법’이란 소책자의 핵심 수칙이다. 자세한 내용을 담은 웹사이트도 마련됐다. 그런데 뜻밖의 변고가 생겼다. 토머스 스콧이라는 대학 2학년생이 정부 사이트와 꼭 닮은 패러디 사이트를 만든 거다. ‘빌딩 밖에서 폭탄이 터졌을 때는 두 번째 폭발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안에 가만히 있으시오’란 공식 행동수칙 다음에 스콧이 ‘요즘 웬만한 테러리스트는 폭탄 한 개로 안 끝나거든요’ 하고 주석을 달아놓는 식이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스콧에게 ‘국민이 헷갈릴 우려가 있으니 사이트를 폐쇄하라’고 e메일을 보냈다. 스콧은 패러디를 보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응수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들 심리에 자리 잡은 공포와 편집증적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게 BBC 인터넷판의 전언이다. 패러디 사이트야 웃자고 만들었겠지만 영국 정부가 위기 때 행동 요령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홍보한 건 의미가 있다. 실제 위기 때는 상식과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가 자욱하면 그걸 피해 돌아갈 것 같지만 현실에선 외려 연기를 뚫고 헤쳐가려 애쓰는 게 한 예다.

▷미국은 9·11테러 발생 약 반년 후 테러 위협을 알리는 경보체제를 만들었다. 녹색부터 흰색 노란색 오렌지색 빨간색으로 위험도가 높아진다. 처음엔 시민들이 긴장했지만 이젠 ‘늑대 경보’가 아니냐며 ‘경보 피로증후군’을 보이는 추세다. 지난달 1일 한 단계 상승된 ‘코드 오렌지’는 민주당 전당대회 후 지지율이 오른 존 케리 대통령 후보를 겨냥한 정치적 카드가 아니냐는 시비도 분분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을 내놓았다. 관심(파랑)-주의(노랑)-경계(오렌지)-심각(빨강)의 단계별로 정부 부처 및 기관의 대응 방안이 담겼다. 안보 재난 핵심기반 등 3개 분야 30개 위기 유형에 대한 매뉴얼이 나왔지만 정작 현 시국이 어느 정도 심각한 위기상황인지에 대한 경종은 없다. 위기를 위기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기관리’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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