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린뱌오 비행기 추락사

  • 입력 2004년 9월 12일 18시 38분


밤 12시를 약간 넘긴 시간, 중국 베이징 근교의 산하이관(山海關) 공항.

“기름 다 채울 시간 없다. 빨리 이륙해.”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의 채근에 조종사는 황급히 트라이던트 256기의 시동을 걸었다. 비행기는 이륙하면서 활주로 부근에 서 있던 트럭을 스쳤다. 날개에서 불꽃이 튀었다.

잠시 후,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전화벨이 울렸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였다.

“이륙했습니다. 미사일 사정권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오의 대답은 선문답과 같았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고 과부는 재혼하게 돼 있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소? 그냥 내버려 두시오.”

마오가 공식적으로 지명한 제2인자, 린뱌오 몰락극의 대단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린은 1965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최대 수혜자였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의 말대로 국방부장 린은 문혁 과정에 든든한 뒷받침이 됐고, 모자라지 않은 대가를 보장받았다.

그의 몰락은 자신의 조급함에서 비롯됐다. 1970년 3월, 마오는 전인대(全人大)에 국가주석직 폐지를 제안했다. 주석으로 권력을 키우다 제거된 류샤오치(劉少奇)의 전례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

‘넘버2’였던 린은 이를 권력 승계의 호기로 봤다. 주석직 유지를 제안해 마오가 거절하면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다는 계획이었다. 음모를 알아차린 마오는 저우를 내세워 린 일파에 대한 정풍(整風)에 들어갔다.

코너에 몰린 린은 군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남쪽을 순방 중인 마오를 살해한다는 암수(暗數)였다. 마오가 재빨리 12일 베이징으로 돌아오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남은 선택은 손자(孫子)의 36번째 계책밖에 없었다.

그의 비행기가 이륙한 다음날인 14일, 울란바토르 주재 중국대사는 몽골 외무부의 호출을 받았다.

“어제 귀국의 비행기가 예고 없이 몽골 영공을 침입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운도르한 지역에 추락해 탑승자 9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확실한 보장을 요구합니다.”

보고를 받은 마오의 반응은 차가웠다.

“끝장 치고는 나무랄 데 없군.”

이륙 때의 날개 파손 또는 연료 부족 때문에 추락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있을 뿐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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