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5년 나치 뉘른베르크法 공포

  • 입력 2004년 9월 14일 18시 47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매년 나치 전당대회가 열렸다.

1935년 9월 15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독일제국 시민법과 혈통보호법, 이른바 뉘른베르크법이 공포됐다.

시민의 자격에서 유대인을 제외하고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했다. 또 유대인을 게토에 격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법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법을 명확히 적용하기 위해 ‘유대인의 범위’에 대한 보충 법령도 제정했다.

친가와 외가 조부모 4명 중 3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 2명이 유대인이면 1급 혼혈아, 1명이 유대인이면 2급 혼혈아가 됐다.

1급, 2급 혼혈아로 분류된 유대인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해방’ 절차가 도입됐지만 이를 통해 해방된 유대인은 거의 없다. 1939년의 경우 약 2100건의 인종 재분류 신청 중 12건만 승인됐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 12건에 해당한 경우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에 합병되면서 뉘른베르크법이 오스트리아에서도 적용됐다.

비트겐슈타인은 외조부모 중 1명이 유대인이었으므로 친조부모 중 적어도 1명은 유대인이 아니어야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순수 유대인이 아니라) 사실은 발데크공(公) 가문의 사생아”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안이 엄청난 갑부였던 덕분에 금 1.7t에 해당하는 돈을 독일제국에 지불하고 비트겐슈타인은 1급 혼혈아라는 인증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법에 기초한 학살도 법의 심판을 받았다.

뉘른베르크에서는 1945년 11월 독일 전범에 대한 첫 번째 국제군사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의 법적 근거는 승전국들이 작성한 ‘국제군사재판 조례’였다. 재판은 11개월 동안 403차례의 공판을 거쳐 이듬해 10월 1일 끝났다. 12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4명은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뉘른베르크는 2001년 4월 ‘나치 잔재 청산의 상징’으로 유네스코 인권상을 수상했다. 사람이 아닌 도시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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