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2002년 한국서 인공기 첫 공식 게양

  • 입력 2004년 9월 15일 18시 33분


“우리가 이씨 왕조의 유물을 또 이용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국기는 그 국가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태극기를 그대로 두자는 의견에 반대합니다.”

1948년 7월 북한 제5차 인민회의. 김두봉(金枓奉·당시 헌법제정위원장)의 일갈에 ‘태극기 존속론자’들은 숨을 죽였다. 항일운동의 표상이었던 태극기가 ‘반동분자의 향수’로 전락하는 순간이자 인공기가 북한의 상징으로 공인되는 자리였다.

광복 직후 김일성은 태극기와 소련기가 나란히 걸려 있는 단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기의 권위를 남측과 나눠야 한다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새 깃발 제작을 지시했다.

도안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조카인 화가 신해균이 맡았다. 북한은 해공을 ‘젊어서 개화사상 바람에 떠돌아다니고 파쟁만 일삼느라 형과 조카를 돌보지 않았다’고 격하함으로써 깃발 도안자의 ‘부르주아적 출신 성분’을 탈색했다.

두 개의 정부 출범과 6·25전쟁 이후 두 깃발은 어느 한편에서의 지독한 금기(禁忌)였다.

금기는 남쪽에서 깨졌다. 아시아올림픽위원회 규정에 따라 모든 아시아경기대회 참가국의 국기는 경기장에 게양되어야 했다.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때 인공기는 부산 시내 공공장소 26곳에서 ‘합법적으로’ 휘날렸다. 122장의 인공기를 부랴부랴 제작한 염색업체 간부는 “모두 겁을 먹어 작업하는 손이 떨렸고 시간도 두 배 걸렸다”고 술회했다.

파문은 적지 않았다. 참가국 국기 게양과 기수를 맡은 국군 의장대는 인공기 게양을 거부했다. 군악대와 경찰악대는 북한 국가―공교롭게도 곡명은 ‘애국가’로 한국과 같다―를 연주하지 않았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민간인 자원봉사자를 동원해야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왜 인공기 응원을 금지하느냐’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북한의 미녀 응원단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신이 팔려 있는 가운데 국가보안법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인공기의 해금(解禁)’은 봄비에 눈 녹듯 갑작스러웠다.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으로 또 한번의 ‘지위 상승’을 기대하고 있을 터인 인공기가 ‘데뷔 2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하지만 북에서 ‘태극기의 해금’은 아직 기별조차 없다.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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