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피의자와 피해자

  • 입력 2004년 9월 15일 18시 45분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유영철이 지난달 구금 중인 서울구치소에서 인권 침해를 당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했다고 한다. 그의 변호인에 따르면 ‘독방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항상 사슬을 채워 두고 있으며 운동을 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진정은 요컨대 자신도 범죄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아니냐는 항변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의 손에 무참히 죽어간 피해자들과 그 가족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망각한 채 인권 운운하는 게 안타깝고 가련해 보이기도 한다.

인권위로서는 일단 진정이 접수된 만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영철이 누구냐를 떠나 객관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겠다는 게 인권위의 방침인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을 새삼 거론하는 것은 그의 진정을 계기로 관심 밖에 놓인 범죄 피해자의 인권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취지에서다. 마침 지금 서울에서는 인권 관련 국제대회도 열리고 있다.

근대 형사소송법은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로부터 범죄 피의자를 보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법무부가 발표한 우리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보더라도 앞으로 범죄 피의자는 지금보다 한층 인권을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범죄 피해자의 경우는 어떤가. 법에 의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피의자의 인권 보호라는 형사정책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장애요소로 여겨져 오지 않았던가. 피해를 보고 신고해도 사건 처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소홀함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안겨 주고 나아가 형사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낳을 수도 있다. 우리의 범죄 신고율(20% 내외)이 선진국(50∼60%)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은 이런 불신과도 관련이 있다고 형사정책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는 지금 범죄 피해자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려는 게 일반적인 추세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피해자 보호 관련법을 만들어 시행 중이다. 유엔도 1985년 ‘범죄와 권력 남용 피해자에 관한 사법의 기본원칙 선언’을 통해 회원국들에 피해자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보호할 적정한 수단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법무부가 최근 범죄 피해자 관련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내년 상반기까지 ‘범죄 피해자 기본법’을 만들겠다고 밝힌 것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고무적인 일이다.

범죄 피의자나 피고인이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인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가만히 있다 범죄를 당한 선량한 피해자들의 인권은 더욱 존중돼야 하지 않을까.

국가기관과 인권단체들은 거대담론도 좋지만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피해를 구제해 주는 ‘작은’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 주길 당부하고 싶다. 다만 한 가지, 피해자 보호가 피의자나 피고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명분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진녕 사회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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