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에 아랍 세계가 들끓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과의 네 차례 중동전쟁에 앞장섰던 이집트의 평화 제의는 아랍인들에게는 ‘변절’이었다.
전쟁에 지쳐 있던 이스라엘은 즉각 화답했다. 그러나 화해는 쉽지 않았다.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세 차례 만났지만 ‘평화를 위한 대화를 계속한다’는 원론적 합의문을 만들어 내는 데 그쳤다.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8년 9월 3일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를 워싱턴 근교 캠프데이비드 별장으로 불러 협상에 들어갔다. 핵심 쟁점은 시나이반도 반환. 1967년 3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땅이었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카터 대통령이 중재의 묘(妙)를 발휘했다.
양측이 원하는 땅은 같았지만 이유는 달랐다. 아랍권의 분노를 의식한 사다트 대통령은 무언가를 얻어 가야 했다. 이스라엘은 안보상의 이유로 시나이반도가 필요했다. 카터 대통령이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돌려주는 대신 미국은 이스라엘에 최첨단 조기경보시스템을 제공한다’는 중재안을 내놓자 비로소 두 정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17일 역사적인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정식 발효됐다.
1978년 말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가 함께 받은 노벨평화상은 지구촌 주민들이 이들에게 안긴 축하의 꽃다발이었다. 그러나 그것뿐. 중동지역에 피의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의미는 퇴색했다. 협상의 주역들도 곧 무대 뒤로 사라졌다. 카터 대통령은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이 실패하면서 1980년 백악관을 떠났다. 사다트 대통령은 1981년 이슬람원리주의자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베긴 총리는 198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캠프데이비드협정은 유대-아랍간 수천년 적대관계의 당사자들이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행동에 나선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외교적 승리의 하나였으며 평화를 향한 여정의 시작이었다.”(협정 체결 당시 이집트 외무장관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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