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미엘의 일기’…펜을 든 명상, 깨달음을 얻다

  • 입력 2004년 9월 17일 16시 48분


◇아미엘의 일기/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지음 김욱 옮김/492쪽 1만8000원 바움

‘일기는 고독한 인간의 위안이자 치유다. 날마다 기록되는 이 독백은 일종의 기도다. 영원과 내면의 대화, 신과의 대화다. 이것은 나를 고쳐주고 혼탁에서 벗어나 평형을 되찾게 한다. 의욕도 긴장도 멈추고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게 한다. 일기를 쓰는 행위는 펜을 든 명상이다.’(본문 중)

이것은 열여덟 살 때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예순 살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써 온 한 남자의 말이다.

주인공은 프랑스계 스위스인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1821∼1881). 유럽 인문사(人文史)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후반 스위스 제네바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이다.

자기 수양의 도구로 일기를 썼던 아미엘과 일기 원본. 톨스토이는 스위스 제네바대 철학교수였던 아미엘의 일기를 읽고 아우렐리우스나 파스칼에 버금가는 문학이라고 평했다. -사진제공 바움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유럽에서는 그의 사후 발간된 ‘아미엘 일기’를 통해 ‘일기문학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톨스토이는 그의 일기를 아우렐리우스나 파스칼에 버금가는 문학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남에게 읽히려고 쓴 것이 아니었기에 원고는 그가 죽은 후에야 발견되었다.

그의 일기가 각광받은 이유는 단순한 신변잡기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의 성찰과 명상을 담았기 때문이다. 광속으로 변하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기록했다. 시공이 달랐던 작가가 썼다는 괴리감이 없는 것은 그가 보편적인 삶의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체념하는 것을 배우는 수업과 같다. 우리의 주장이나 희망, 힘과 자유를 줄이기 위한 수업이다. 처음엔 모든 것을 배우고 바라보며 정복하려 하지만 어떤 길을 택하든 결국 자신의 한계와 마주치게 된다. 타인의 손에 쥐어진 보물은 마치 나에게도 똑같은 분량으로 약속되어 있다는 듯 착각한다. 그러나 그 꿈은 곧 날아가 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비천하고 한계가 있고 나약하고 의존하고 싶어 하며 무지하고 빈약하고 가난하고 무일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35세 때 일기 중)

아미엘의 일생은 세속적으로 성공한 삶은 아니었다. 병마에 시달렸으며 궁핍했다. 직업은 비록 철학교수였지만 유럽의 변방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사상이 늘 주변부에 맴돌고 있음에 절망했다. 그리고 독신으로 살았다. 짝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긴 세월 타인과 함께 무언가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결국 공포라는 것을 깨달아 ‘결혼이란 환상’에 취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고독과 육체의 고통을, 영혼의 동요를 예리하고 깊게 차가우면서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의 고백은 같은 시대 낭만파 작가들의 병적인 불안을 대변하는 것이었지만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도처에서 싸움과 논쟁, 불화가 빈번하다. 세상이 시끄럽다.…이제 인간의 세계는 몇몇 전제적인 영웅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대중의 정치로 넘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와 같은 자리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는 논리를 말한다.…진정한 인간일수록 인간에게서 고립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힘을 기르고 평화를 사랑할수록 인간은 고독해진다.…뛰어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이웃, 그리고 백성이 던진 돌에 맞을 가능성이 많다. 사랑이 더 이상 인간성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랑은 오직 육체적이고 변태적인 행위에만 이름이 도용될 뿐이다.’(51세 때 일기 중)

문명은 진보하고 과학은 발전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토로하는 이런 불변성은 종종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가 겪은 내적 모순은 우리 삶의 모습과 너무 비슷하고 그의 외침은 인간을 둘러싼 질문에 대한 해답과 같다.

하루하루 산다는 게 만만치 않다. ‘일기쓰기’를 자기 수양의 도구로 삼았던 아미엘처럼 이 가을엔 조용히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기를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원제 Les Fragments d’un Journal intime(2004년).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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