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 입력 2004년 9월 17일 17시 08분


조선 경제는 18세기까지 거대한 국가재분배 체계와 중계무역을 통해 꾸준히 성장했으나 19세기 들어 엄청난 불황을 겪으며 경제 파탄에 직면한다.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장시의 숫자는 1830년 614곳에서 511곳으로 줄어든다. 사진은 19세기 말 조선 장시의 풍경. -사진제공 서문당
조선 경제는 18세기까지 거대한 국가재분배 체계와 중계무역을 통해 꾸준히 성장했으나 19세기 들어 엄청난 불황을 겪으며 경제 파탄에 직면한다.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장시의 숫자는 1830년 614곳에서 511곳으로 줄어든다. 사진은 19세기 말 조선 장시의 풍경. -사진제공 서문당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이영훈 편/409쪽 2만원 서울대학교출판부

‘민족주의 실증사학’을 앞세운 한국사학계는 지금 사방에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허구다’라는 모토를 내세운 서양사학계는 아예 ‘국사해체론’으로 전면전을 선포했다. 한문학계와 사회사학계는 미시사의 참호를 파고 정치와 사상 중심의 거시사의 뿌리를 세차게 흔든다. 그리고 경제사학계는 과거 한국사학계가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무력화한 실증적 방법론으로 더욱 투철히 무장한 ‘수량경제사’로 압박을 가한다.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바로 경제사학계가 민족주의 사학계를 정조준한 함포사격이다. 민족주의 사학계는 일제의 ‘조선사회정체론’을 반박하기 위해 조선 후기에 이미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는 ‘자본주의맹아론’을 제기해 왔다. 1987년 안병직 당시 서울대 교수와 이대근 성균관대 교수를 중심으로 설립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이에 맞서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본격화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했다.

이 책은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 낙성대경제연구소 2세대들의 새로운 실증연구의 첫 결실이다. 이들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2년 8월부터 3년간에 걸친 ‘한국의 장기경제통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은 그중 1650∼1910년의 인구, 임금, 지대, 물가, 이자율, 경제성장률 등의 통계를 추출하고 분석한 1차연도 연구논문 9편을 모은 것이다.

양반가의 족보와 쌀값과 이자율 기록, 각종 의궤(儀軌)에 나타난 임금 기록, 족계(族契)와 동계(洞契) 등의 지대 기록 등을 분석한 이 책의 결론은 조선 후기 경제가 18세기까지 안정기 또는 발전기를 거쳐 19세기에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증가 일로에 있던 인구는 사망률의 증가와 함께 감소 추세로 돌아서고, 쌀값 등 물가는 폭등한 반면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18세기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던 중국과 일본간 중계무역의 감소로 중앙정부의 은 보유량은 1742년 100만냥에서 1782년 43만냥으로 줄었다. 또 해안의 목재 벌목을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내륙의 산림은 황폐해졌고 이는 논의 단위생산량 감소와 농촌 장시의 감소 등으로 이어지면서 연간 1000만여섬에 이르는 환곡제의 해체를 낳았다. 이는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외세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정도로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조선 경제의 반자본주의적 성격도 지적했다. 19세기 말까지 쌀과 포목 등 상품이 화폐를 대신했고 이자율이 연 30∼40%의 고율이었다는 점은 자본 축적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또 모군(募軍)이라 불린 가난한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장인(匠人)이라 불리는 숙련노동자보다 높았던 점이나 18세기 중엽 연간 1000만섬에 달했던 환곡제는 비시장적 도덕경제의 강고한 존속을 보여 준다.

그러나 통계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조선경제가 한계에 도달했음은 이미 수많은 민란이 입증한다. 또 경제적 위기가 꼭 그 위기를 극복할 내적 동력의 고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도 산업화 초기 농촌경제의 붕괴와 극심한 임금 하락을 경험했고 일본경제 역시 개항을 전후해 농업생산력의 감소와 물가폭등에 직면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학계의 또 다른 응전을 기대해 본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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