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선비의 배반’… 조선의 몰락, 사림에게 묻는다

  • 입력 2004년 9월 17일 17시 15분


조광조
◇선비의 배반/박성순 지음/262쪽 1만1800원 고즈윈

조선의 국력은 세종∼성종 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세종 대에는 고려말에 비해 농지 면적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군정(軍丁) 수는 100만명에 달했고 군사력의 확대는 여진과 쓰시마정벌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한 세기 반 뒤 일본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조총의 위력이 그리 강력했던 것일까.

“참패의 진짜 이유는 당시 정권 담당 세력인 사림파의 도덕적 해이였다.” 저자는 서슴없이 말한다. 정권과 경제력을 장악한 사림(士林)이 돈으로 병역을 대신하는 대역제(代役制)와 수포방군(收布放軍)으로 개병제를 무너뜨렸으며 이는 국가 방위망을 와해시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데 기여했다는 고발이다.

남송 학자 진덕수가 성현의 말을 모으고 주석을 붙여 편찬한 ‘심경’. 조선 중종 이후 사림파는 임금의 권력을 제약하기 위해 인격 수양에 관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을 이용했다. -사진제공 고즈윈

조선시대 유학사상사를 전공한 저자는 책 제목에서 보듯 일관되게 ‘조선조 사림의 도덕적 배반’에 칼끝을 겨누고 있다. 교조적 주자학 세력은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정치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이를 가로막았고 군주의 권력을 제약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대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사림 세력 확대의 시금석 격이 되는 책을 독자 앞에 내놓는다. 책의 이름은 심경(心經). 남송의 학자인 진덕수가 성현들의 말을 모으고 주석을 붙인 이 책은 이름 그대로 ‘마음닦기’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조선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중심에 등장했다.

‘심경’이 수입된 중종대의 조광조 일파를 시작으로 사림은 끊임없이 경연(經筵·임금에게 옛 문헌을 강의하는 자리)에서 이 책을 다루자고 요구했다. 현실정치를 표방한 광해군은 요구를 무시하다 제거됐다. 정통성에 문제를 가진 효종 대에 이르러 사림은 심경을 경연 과목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현실주의적 역사관을 가진 현종은 심경 강독을 중지시켰으나 사림의 압력에 밀린 뒤 개혁을 접어야 했다.

왜란 호란 이후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림파는 임금에게 현실정치에 대한 공부 대신 ‘마음닦기’만을 강조했다. “민생과 현실을 중시하던 관학파의 유풍은 상실되고 의리 명분만을 앞세우는 공리공담(空理空談)의 사회가 됐다.” 사림은 향약 등 향촌 자치를 강조하면서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쌓아나갔다.

왜 ‘인격 수양’의 책이 사림 세력 확대의 도구가 됐을까. 저자는 숙종대 송시열의 발언에서 단서를 찾는다. “임금과 유생의 학문은 같은 것이고 심경이 그 교과서다.” 그 말처럼 ‘심경’을 읽으며 다같이 ‘마음’을 닦는 가운데 군주의 우월함은 사라지고 신하와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이를 통해 재상 중심의 정치가 정당성을 인정받게 됐던 것이다.

결국 순조 대 이후의 세도정치기에 이르자 심경 경연은 중단된다. 왕권에 대한 신권의 우월은 새삼 강조될 필요도 없는 것이 됐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도덕적 해이가 절정에 이른 가운데 조선은 대비 없이 외세의 침입을 감당해야 했다.

“나는 이 책을 정부의 주도적 인사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들이 왠지 기묘사화의 희생양이 된 조광조 일파로 보이기 때문이다. 청신(淸新)성을 장점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미숙함과 이에 못지않은 정치적 야망이 혼합된 이중적 인격체로 파악되는 것이다. 실수하지 않기 바라는 충정을 헤아려 주시기를….”(저자 후기)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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