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최수묵]상처받은 과학자들

  • 입력 2004년 9월 17일 18시 37분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인 대전 대덕연구단지는 요즘 초상집 분위기 같다. 핵물질 실험 파문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소뿐 아니라 다른 기관의 연구원들도 대부분 침울한 모습이다. 외신의 잇단 의혹 보도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계속되는 사찰에 말을 잃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다. 정부가 “개입한 적이 없다”며 과학기술자들을 남 보듯 하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원들은 ‘무지한 사람들’이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일부 부처는 중징계론까지 거론하고 있다. 과학기술자들의 체감온도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이상이다.

정부의 처지도 이해는 간다. 국제적 신뢰와 북한 핵문제가 걸려 있다.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과 1992년 비핵화선언도 어쩔 수 없는 제약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자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듯한 정부의 태도는 도를 지나쳤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국립연구기관에 속해 있던 ‘자식’ 같은 존재가 아닌가. 원자력연구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런 정서가 넘쳐난다.

“무능한 정부 덕에 마음고생이 심하겠다”(홍길동), “세상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임들의 열정적인 도전과 열매에 경의를…”(직장인) 등 위로와 격려의 글이 열흘 이상 줄을 잇고 있다.

한 네티즌은 “중국을 다녀오다 비행기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부국강병을 외치고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중국, 핵 재처리를 통해 38t의 플루토늄 보유를 국제공인받은 일본, 그러나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에 얽매여 내부 싸움에 몰두하는 한국의 모습이 오버랩됐을 것이다.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의 심오한 사실들은 꼭 쓸모가 있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과학기술자들은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생명처럼 아낀다는 이야기다. 자연의 수수께끼 자체가 그들의 연구 대상일 수 있다.

절차의 문제, 행정적 착오는 법대로 처리하면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을 선진국 진입의 동력으로 삼겠다면 그들의 자존심을 꺾어선 곤란하다. ‘시키는 일만 하는’ 과학기술자들이 어떻게 ‘무궁화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최수묵 국제부 m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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