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386, 위치가 바뀌었는데…

  • 입력 2004년 9월 19일 19시 05분


요즘 여권의 개혁정책을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 빚어지는 논란의 핵심은 결국 ‘개혁이 밥 먹여 주느냐’에 있는 것 같다.

386세대가 중심이 된 여권의 개혁세력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한 인권국가 지향, 과거사 청산을 통한 정통성 확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이를 우선적으로 완수하는 데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이끈 386세대가 이념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해할 만한 측면이 없지 않다.

반면 무너지는 경제로 고통받고, 체제의 안정성에 불안을 느끼는 상당수 국민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책 추진 대신 먹고사는 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을 절박한 심정으로 여권에 촉구하고 있다.

최근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도 이른바 ‘웰빙(Well Being·참살이)’이 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뜨는 것도 ‘잘먹고 잘살기’가 많은 사람들의 절대적인 관심사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인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명예와 권력을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특히 여권의 386정치인들은 노무현 정부 출범 후 과거 고생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았음을 부인키 어렵다. 그들이 차지한 요직 가운데는 일반 공무원이나 국민이라면 평생 노력해도 바라보기 힘든 자리도 많다. 그런 면에서 386정치인들의 과거 운동권 활동은 당시엔 위험이 따랐지만 결과적으론 과실(果實)이 큰 ‘벤처(Venture)’였던 셈이다.

그들의 성공을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경제계를 중심으로 386정치인들의 현실인식에 대한 비판과 질타의 목소리가 높은 것을 보면 그들이 국정을 잘 이끌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왜 이렇게 됐을까.

386정치인들은 청년시절 사회주의 이념을 포함한 사회과학 분야에 대해선 밤새워 책도 읽고 열띤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또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점에 대해서도 깊은 문제인식을 갖고 있었으리라. 그에 비해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글로벌 스탠더드 등에 대한 공부는 소홀히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공부한 것과 지금 그들에게 요구되는 현실적인 역량 사이에 상당한 갭이 생긴 것 아닐까. 386정치인들 가운데 이렇다 할 경제통 국제통이 없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분명한 것은 386정치인들은 이제 남을 비판만 하면 되는 위치에서 국민과 역사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그들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스스로 남에게 비판받을 일이 없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언젠가는 역사의 평가 대상이 될 텐데도 말이다.

‘이념이 먼저냐, 빵이 먼저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 해묵은 논쟁이다. 다만 국민을 잘살게 만드는 것이 정치인들의 책임이라는 점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개혁도 좋지만 훌륭한 정치란 개인의 웰빙을 사회적, 국가적 웰빙으로 끌어올리는 것임을 386정치인들이 되새겼으면 한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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