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는 평생에 걸쳐 인간의 원죄와 구원이라는 테마를 구현했던 음악가였다. 유럽 사회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던 시절, 바그너 역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아리안과 게르만 신화를 독일 사회에 전파했다.
그의 작품에는 신화와 영웅, 초인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니벨룽의 반지’에서도 라인 강의 황금으로 만든 반지를 되찾기 위해 인간 영웅 지크프리트가 나선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선 극명하게 엇갈린 두 가지 태도가 존재했다. 추종하거나, 경멸하거나.
열렬한 팬이었던 히틀러는 가두행진을 할 때도 바그너의 ‘순례자의 선율’을 틀었다. 유대인들은 반대로 수용소에서 히틀러가 좋아하는 작곡가라는 이유만으로 아침저녁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증오를 곱씹었다.
“나는 사랑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나는 보고 있지만 동시에 눈이 멀었다. 나는 살고 싶다. 동시에 죽고만 싶다. 나는 축복 받았는가? 저주 받았는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본 후 밤새 잠을 못 이뤘다는 스물한 살의 유대인 청년 지크문트 프로이트. 후에 위대한 정신분석학자가 된 그조차 바그너에 대한 애증으로 혼란스러워했다.
바그너 자신은 영웅이라기보다 약점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평생에 걸쳐 수많은 염문과 배신이 그를 따라다녔다. 한때 그의 추종자였던 니체는 나중에 “실제로는 퇴폐적이며 절망스러운 인물로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갑자기 몰락하고 산산이 부서져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문예와 음악, 무도(舞蹈)가 결합돼야 한다는 예술론을 폈다. 그 자신 역시 작곡가이기에 앞서 뛰어난 시인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비범해야 한다는 것이오. 내게 있어 시인과 음악가의 연합에 악센트가 주어져야 하오. 음악가만으로서 나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오.”
작곡가로서 그는 바흐나 모차르트는 물론 같은 시기의 브람스에 대해서도 열등감을 느꼈다. 문예와 음악의 결합은 그가 선택한 생존 전략은 아니었을까.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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