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9월 24일 사기혐의로 검사 앞에 선 ‘종말론 전도사’ 이장림 목사의 변명은 구차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만 10월 28일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주장한 그는 34억여원의 헌금을 착복했다. 그가 숨겨둔 채권의 지급일은 ‘휴거 이후’인 1993년 5월이었다.
이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7년 환란설, 천년왕국설 등을 짜깁기하고 유럽연합(EU) 출범 등의 정세를 대입해 ‘종말의 날’을 예언했다. 그는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았다는 청소년들까지 동원해 교세를 넓혀갔다. 경찰은 종말론 신도를 전국 250여 교회의 2만여명으로 추산했다.
신도들에게는 현세가 부질없었다. 재산을 버리고 가정도 버렸다.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했고 임신부는 아기를 낙태했다. 이 목사는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포기해야 휴거될 수 있다”며 재산 헌납을 부추겼다.
휴거날이 가까워지자 신도들은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손목을 잡는 남편에게 아내는 “악령에 씌었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혼란이 확산되자 당국은 9월 24일 이 목사를 전격 구속했다. 하지만 이미 불이 댕겨진 ‘집단적 광기(狂氣)’는 식을 줄 몰랐다. 심지어 이 목사 스스로 휴거설을 철회하며 사과 성명을 냈지만 ‘인생역전’을 믿는 신도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10월 28일 밤. 전국 166개 교회에 흰옷을 입은 신도들이 집결했다. 나방 한 마리가 불빛 속을 날자 누군가 “나방이 휴거된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환호했고 두 팔을 들어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집회 주최자들은 뒷문으로 도망쳤고 멍한 표정의 ‘흰옷 부대’는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비척비척 흩어졌다.
1년 뒤. 이 목사는 출소 후 가진 첫 설교에서 “시한부 종말론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으며 영혼에 대한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고단한 삶을 잊게 만드는 ‘영혼의 마약’.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중독된 우리 사회는 얼마나 허약했던가.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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