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비주, 숨겨진 우리술을 찾아서’

  • 입력 2004년 9월 24일 15시 59분


과하주(過夏酒)가 이름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 강하주를 빚는 전남 보성의 도화자씨(55)가 솥에 밑술을 붓고 소줏고리를 얹고 있다. 과하주는 우리식 칵테일 술이다. -사진제공 웅진닷컴
과하주(過夏酒)가 이름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 강하주를 빚는 전남 보성의 도화자씨(55)가 솥에 밑술을 붓고 소줏고리를 얹고 있다. 과하주는 우리식 칵테일 술이다. -사진제공 웅진닷컴
《모든 맛과 모든 멋은 술로 통한다. 술은 심연(深淵)과 같다. 한번 빨려들면 끝이 없다. 술의 실체를 잡는가 싶으면 어느새 안개처럼 부서진다. 술을 빚는 장인. 그들은 최고의 술을 빚기 위해 구름 속으로 화살을 쏜다. 우리 땅에 솟아난 우리 술. 곡물과 약초의 절묘한 결합. 전통 술에는 신비한 세계가 있다. 혼이 담긴 우리 술과 정을 빚는 명인들. 그들이 있기에 우리 술이 있다.》

술자리라고 해서 술이 주역은 아니다. 술은 언제나 분위기를 돋워주는 역할에 그칠 뿐, 그 모임의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요즘 우리 사회의 술을 대표한다는 소주와 맥주, 그리고 폭탄주가 그런 대상이 되기에는 한참 역부족이다.

목으로 털어 넣기 바쁜 술 문화 탓에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것으로만 알았던 한국의 전통술들을 지은이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아내 우리에게 내민다.

100가지 화초에 100가지 꽃을 넣은 백화주(百花酒), 대나무 기름을 받아낸 죽력고(竹瀝膏), 앵두잎 배잎 인진쑥이 들어간 잎새곡주, 개고기를 고아 넣은 무술주(戊戌酒), 밀주 단속의 고난을 이겨낸 짚가리술, 우리식 칵테일인 과하주(過夏酒) 등 낯설지만 귀한 술이다.

제자(題字) 죽봉 황성현

지은이는 이런 술들을 음미와 찬미의 반열에 놓는다. 단지 우리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화주에 들어가는 100가지 꽃은 저마다 피는 철이 다르기 때문에 1년을 꼬박 산으로 들로 돌아다녀야 겨우 모을 수 있다. 여기에 말려 놓으면 깨알처럼 작아져 버리는 꽃도 있으니 그 양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대나무를 고아서 뽑은 기름인 죽력을 얻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대나무 토막을 가득 채운 항아리와 흙 속에 파묻은 자배기의 주둥이를 맞대어 놓은 뒤 왕겨를 무덤처럼 덮고 사흘 동안 불을 지펴 고아낸다. 이만 한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술은 약이기도 하다.

잎새곡주는 머리가 맑아진다고 해서 옛날 과거를 보러 갈 때면 호리병에 담아 가서 과거 보기 전날 밤에 마셨다고 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관군에 잡혀갈 때 죽력고를 찾았다고 한다. 술을 먹고 고통을 잊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술에 일본도에 다친 다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전봉준의 기개를 돕는 술이기도 했다. 또 무술주는 노인들이 식전 또는 식후에 간장 종지 한잔 정도를 마시면 장수에 도움이 된다.

약을 마시니 과용하지 않을 거고 주사(酒邪) 부릴 일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한산 소곡주 같은 술은 마시면 손끝 발끝부터 취한다고 한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에 옛 선비들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서도 더 맑아진 머리로 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부터 취해 손과 발을 제멋대로 휘두르게 하는 지금의 술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선조들은 ‘향음주례(鄕飮酒禮)’라 해서 술의 예법을 익히기까지 했다. 일배백배(一杯百拜·술 한 잔에 절 100번)의 마음으로 술을 대한 것이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해 술을 대접하기까지의 동작이 102단계로 구분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전통술을 너무 엄숙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지은이가 염두에 두는 것은 전통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술을 만들고 음미하고 상찬(賞讚)하는 과정이다. 술이 없어지면서 그 술이 동반했던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달착지근하고 쌉싸래하고 시큼새큼한 맛을 지닌 우리 술을 만들기 시작해서 몸과 마음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누렸던 그 느긋함의 정신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책에서 술에 얽힌 재미있는 상식을 얻을 수 있다. 부의주(浮蟻酒)는 술이 다 익으면 쌀알이 개미처럼 동동 떠오르기 때문에 개미 ‘의’자를 넣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동동주가 바로 이 술이다.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바로 짐을 꾸려 그 술의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힘이 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정철의 ‘장진주사’▼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 이어 매여 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앙숲에 가기 곧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잿납이 휘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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