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이라는 영화가 아니었나?”
변사가 흠흠 헛기침을 하자 수군거림은 가라앉았다. ‘개와 고양이’는 단지 시선을 끌기 위한 장치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자∼ 백성들이 바야흐로 오랜 세월에 쌓인 슬픔을 읊고자… 경성에서 철학공부를 하다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
영화 속 주인공 영진은 헛소리를 하며 고향 마을을 휘젓고, 이를 보는 누이 영희의 가슴은 쓰리기만 하다. 부자와 친일파의 주구인 오기호는 호시탐탐 영희를 노린다. 마을 잔치가 있던 날 오기호는 빈 집에 있던 영희를 욕보이려 한다. 이 광경을 발견한 영진. 낫으로 오기호를 쓰러뜨린다.
일본 순사의 포승에 묶인 뒤에야 정신이 든 것일까.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
멀어져가는 영진의 뒷모습을 화면이 비추는 가운데 악대는 ‘아리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마음 속 깊은 얘기를 숨기는 데 익숙했던 조선 민중은 자신과 이웃의 아픔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듯한 이 영화에 열광했다. 영희 역을 맡은 배우 신일선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목 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어요.”
파장은 전국으로 퍼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9일자는 ‘전 조선 각지에서 도처마다 큰 성공을 이룬 영화’라며 이 영화를 소개했다.
‘아리랑’의 성공은 주연과 감독을 맡은 춘사 나운규(春史 羅雲奎·1902∼37) 혼자의 성공에 그치지 않았다. 관객들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조선 영화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영화 제작사에는 자본이 몰려들었다.
78년 뒤. 우연일까, 오늘날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태극기 휘날리며’가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형제애와 민족을 이야기의 중심에 세운 것은….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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