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5년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 개봉

  • 입력 2004년 10월 3일 18시 45분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개봉됐다.

대사도 몇 마디 없었고, 서양음악으로 된 주제곡(홍난파 작곡)은 어설펐다. 당시 동아일보는 “클라이맥스가 분명치 아니하고 각 부분이 어느 한 점을 향하여 응(應)하게 하는 긴밀한 수법이 쓰여 있지 않다”고 평했다.

그러나 다듬이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는 신기함만으로도 관객이 몰렸다. 입장료는 무려 1원으로 무성영화 관람료의 갑절. 당시 순사 월급이 25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었지만 단성사는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입장료가 뛴 것은 제작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발성 춘향전을 찍는 데 1만원이 들었다. 그 무렵 무성 영화 한 편 제작비는 2000∼3000원, 대작이어도 4000원 정도였다.

제작사인 경성촬영소는 조명과 촬영 설비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촬영장을 개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방음 설비는 젖은 멍석 1600여장을 두 겹으로 쌓는 것이었고 동시 녹음 같은 기술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춘향전은 35년판 블록버스터라 할 만했다.

춘향전은 한국인의 기술로 촬영됐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필우(李弼雨)가 기술을 담당했다. 그는 1920년 연쇄극(연극 중간중간에 촬영한 화면을 끼워 넣은 것) ‘지기’를 찍으면서 한국 최초의 촬영기사가 됐다. 1924년 자본 기술 감독 모두 한국인의 손으로 이뤄진 무성영화 ‘장화홍련’의 촬영도 그가 했다. 1주일 예정으로 개봉된 장화홍련은 흥행으로 이틀 연장 상영됐다.

춘향전과 비슷한 시기에 시도된 발성 영화는 또 있었다. 이필우는 춘향전에 앞서 ‘말 못할 사정’의 촬영에 참여했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인지 3분의 1 정도 촬영한 상태에서 제작이 중단됐다. 나운규도 비슷한 시기에 아리랑 3편을 발성영화로 만들고 있었다. 기술 문제 등으로 제작이 늦어져 1936년 5월에야 개봉, 첫 발성영화라는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

춘향전이 나오고 4, 5년이 지나자 대세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넘어갔다. 30여년간 관객을 울리고 웃기며 일류 영화배우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던 변사들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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