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적 불균형성장의 그늘에 대한 회의와, 특히 80년 광주의 비극 위에 집권한 정통성 없는 정권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민중주의를 키웠다. 적잖은 젊은이가 ‘민중이 주인 되는 참 세상’을 향한 근본적 변혁을 꿈꾸었다. 그때 한반도 밖에서는 ‘좌향좌의 시대’가 이미 막을 내리기 시작했지만.
나부끼는 좌파 이념의 깃발에 숨겨진 독소(毒素)를 느꼈더라도 용납하기 어려운 시대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면서 절망적으로 그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여주인공의 자살로 막을 내리는 강석경의 소설 ‘숲 속의 방’은 현실과 이념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젊은이들의 고민을 담고 있다. 운동권 일각의 반(反)지성적 논리와 기성 정치인 뺨치는 독선적 권위주의도 독재정권 종식이란 시대적 대의(大義) 앞에 묻혀서 넘어갔다.
세월이 흘렀다. 민중주의자들은 진정한 권력 주체로 변신했다. 현 정권의 정부여당에는 ‘민중 속으로’와 ‘남북은 하나’를 외치던 사람이 과거 어떤 정권보다도 많다.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모르고도, 정상적 조직생활과 납세의 무게를 거의 경험하지 않고도, 마흔 안팎의 나이에 금배지를 달거나 정부의 1급이나 국장급으로 출세한 ‘성공 투자’가 적지 않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지만 정신적으로는 80년대 운동권에 머물러 있는 권력 실세도 꽤 눈에 띈다.
그런데 이 무슨 역설인가. 민중주의자가 권력 안팎을 장악해 ‘민주개혁세력의 승리와 한국사회의 발전’을 주장하는데 민중의 어깨는 무거워져만 간다. 민주화의 과실을 과분하게 챙긴 함량미달의 투사를 보는 눈은 차가워졌다. 기대 다음에 환멸이 찾아오는 것이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국내외 경제연구기관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4%대로 낮추었다. 기준이 되는 지난해 성장률은 3.1%밖에 안 됐다. 내년은 4%대 초반, 심지어 3%대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올해와 내년 모두 세계 평균보다도 낮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뒤 3년 연속 이처럼 저성장이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잃어버린 5년’은 이미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
삶의 현장으로 눈을 돌리면 더하다. 근로자 농민 자영업자 등 서민의 체감 성장률은 이미 0%, 또는 마이너스다. 이쯤 되면 ‘너무 큰 모자’를 쓴 정권 내 인사들도 현실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장 동력을 무너뜨리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권력이라면 어떤 명분을 내걸어도 노멘클라투라(신 특권층)에 불과하다.
벌써 늦은 감도 있지만 이제라도 달라져야 한다. 국민과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느낀다면 ‘한국호(號) 추락’의 주범인 독선과 분열의 패거리의식 및 아마추어리즘, 공허하고 정략적인 ‘그들만의 개혁’ 구호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복잡 미묘한 구도와, 대기업에서 서민까지 이어지는 연쇄적 연결고리의 중요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경제 및 사회정책 방향을 틀어야 한다. 국가가 가야할 길을 잘못 잡고 말로만 민중을 들먹이는 ‘목소리 크고 무능한 정권’이야말로 어느 나라에서든 민중의 진정한 적이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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