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테레사 수녀 노벨평화상

  • 입력 2004년 10월 6일 18시 46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그보다 더 슬픈 죽음이 있을까.

길거리에 버려져 죽어가는 빈자(貧者)들을 보듬어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 ‘살아 있는 성녀(聖女)’ ‘가난한 사람의 어머니’로 불렸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속세에서 펼친 첫사랑이다.

알바니아 혈통으로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그가 인도 콜카타 빈민촌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운 때는 1948년. 선교회는 최초의 사업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을 열었다.

그들의 악취 나는 몸을 씻기고, 누더기를 정결한 의복으로 갈아 입혔다. 목숨을 소생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1955년 마더 테레사는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도 열었다. “단 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아이라도 데려와 달라”고 호소했다. 주위에선 이해하지 못했다.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지 않느냐”는 말들이 쏟아졌다.

마더 테레사는 단호했다.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사랑을 느끼고 싶어 한다. 죽어가는 아이가 사랑 속에서 최후를 맞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낙태를 죄악시했다. “아기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낙태는 자궁 내 살인이다. 만약 당신이 아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에게 달라.”

유엔이 정한 아동의 해인 1979년 10월 7일 마터 테레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세계 언론은 “정치만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준 일대 사건”이라고 흥분했다.

그에게 찬사와 칭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신학자들은 “‘가난은 아름답다’는 마더 테레사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비판자들까지 보듬었다. 성녀의 사랑의 샘물은 이승의 삶을 마칠 때까지 차고 넘쳤다.

1997년 87세로 눈을 감기 전 남긴 말.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껴안을 수 있습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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