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거짓말하는 애인’

  • 입력 2004년 10월 8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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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이민 가정 출신의 프랑스 작가 가브리엘 마츠네프. 사진제공 문학동네
러시아 이민 가정 출신의 프랑스 작가 가브리엘 마츠네프. 사진제공 문학동네
◇거짓말하는 애인/가브리엘 마츠네프/206쪽 8800원 문학동네

사랑은 작고 사소한 일로 찾아온다. 까닭 없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질 때, 충혈된 내 눈을 누군가가 따뜻한 시선으로 봐 주는 것이다. 또 사랑은 작고 사소한 일로 자멸한다. 터무니없는 의심,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질투, 사소한 거짓말이 마음에 작은 상처를 만든다. 사랑은 상처를 아물게 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사랑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이폴리트. 그는 소르본대에서 라틴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스물두 살의 청년이다. 그는 자신의 첫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한다. 여자친구의 끝없는 질투심을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더할 수 없이 그녀를 사랑했던 것 말고는 잘못한 것이 없는’ 청년이었으니까.

사랑이 떠난 그의 가슴 속에는 이런 사실 하나만이 오롯이 남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오해가 있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이나 인생에서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에게 새로운 여자가 다가온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말수가 적고, 남성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 되어 줄 만한 여자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녀를 통해 그는 의심과 질투가 없는 평온함을 맛보고 싶어 한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바로 질투가 없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 질투가 없는 사랑은 그 후 6개월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엘리자베스의 거짓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한번 시작된 의심은 멈출 줄 모른다. 원래 사랑에 관련된 모든 것은 가속도가 붙는 법이니까. 마침내 그는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게 된다. 거기에는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그녀의 삶은 온통 거짓말투성이였던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애인에게 그는 말한다.

“사랑에는 크고 작은 게 없어. 모든 것이 중요해!”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의심과 질투가 없는 평온한 사랑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일기를 읽는 그 순간, 그렇다고 그의 사랑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의 가슴에는 증오, 미움, 질투…의 감정들이 사랑과 한데 뒤섞여 버린다.

사랑은 내가 원할 때 멈춰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이 내 안에서 스스로 소멸되기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녀의 거짓에 상처 받으면서도 그녀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폴리트처럼. 내 안의 감정이 메마를 때까지, 메마르다 못해 갈라질 때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 상처를 준 후에야 사랑은 물러간다.

사랑은 들어올 때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지만 떠날 때에는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을 닫는다. 영원히 귓가를 맴돌 것 같던 쾅 하는 소리는 금방 잊혀진다. 그리고 이 참에, 문이 닫힌 참에, 열쇠를 새로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그 문을 열어줄 사람을 기다린다.

엘리자베스의 이별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이폴리트도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아가씨를 만난다. ‘웃음이 많고’ 무엇보다 ‘일기를 쓰지 않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이폴리트의 가슴을 똑, 똑 두드렸다. 그러자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다시 열렸다.

윤성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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