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7>卷四. 흙먼지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11일 18시 5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신(臣)도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는 외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받아주신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제 주인에게 불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진평이 한층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게 맹세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것으로 치러야 할 의식은 다했다는 듯 한왕이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 위무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이 먼 길을 오느라 주리고 지쳐 보이는구나. 먼저 상을 내어 배불리 먹게 하고, 객관(客館)으로 보내 하룻밤 쉬게 한 뒤 다시 만나보기로 하자.”

그러자 다시 진평이 나서서 말했다.

“신은 큰일을 하고자 위태롭고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제가 대왕께 드리려는 말씀은 오늘을 넘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 진평의 두 눈에서는 조금 전과 달리 은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주리고 지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왕은 진평에게 따로 상을 차려 술과 밥을 내리고, 마주 앉아 기다리다가 그의 말을 들었다.

진평의 말을 한나절 듣고 나자 한왕은, 한신도 아니고 장량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인재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한신이 타고난 병가(兵家)라면 장량은 도가(道家)적인 사고로 단련된 책사(策士)였다.

이에 비해 진평은 귀곡(鬼谷)을 거치지 않은 종횡가(縱橫家)였다.

실천적이고도 실용적인 점에서 세 사람의 학식과 재주는 비슷했다. 그러나 모두 책을 읽었지만, 진평에게서는 전혀 서생(書生)티가 나지 않았다. 또 인간에 대한 지식도 세 사람 모두 남달랐지만, 진평은 특히 탐욕이나 허영 같은 인간의 약점에 밝아 이채로웠다.

한왕은 그 모든 걸 그저 막연한 직관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었으나 그 때문에 진평을 얻은 기쁨이 줄지는 않았다.

마침내 말을 끝낸 진평에게 한왕이 새삼 물었다.

“그대는 초나라에서 무슨 벼슬을 하였는가?”

“도위(都尉)였습니다.”

진평이 그렇게 대답하자 한왕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 한나라에서도 도위다. 하나 그냥 도위가 아니라, 참승(참乘)으로 과인과 함께 수레를 타며 호군(護軍)으로 과인에 갈음하여 여러 장수들을 보살피도록 하라.”

그리고 좌우에 명하여 그날로 진평을 참승과 호군을 겸하는 도위로 삼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오래 한왕을 따라다니며 공을 세운 장수들이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우르르 한왕의 유막으로 몰려가 한목소리로 따졌다.

“대왕께서는 어찌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졸개를 하루아침에 그렇게도 높이 세우셨습니까? 그 재주나 사람됨이 높고 낮음을 알아보지도 않고 참승을 삼아 함께 수레를 타시며, 또 호군으로 세워 오히려 우리 나이든 장수들을 감독하게 하셨습니까?”

하지만 한왕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대들 모두 내게는 날카로운 손톱이나 어금니[조아] 같은 장수들이나, 사람의 재주와 쓰임은 여러 갈래다. 진평은 과인이 중원(中原)의 사슴을 쫓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니, 그대들은 더 시비하지 말라!”

그러면서 오히려 진평을 더욱 아끼고 믿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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