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친구로서 대화하자”고 친근감을 나타내며 한국인과 한국 역사에 대해 말했다. “숱한 고난을 극복한 한국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나라”라고 높이 평가했다. 유대인 핏줄을 타고난 그이기에 한국과 이스라엘이 시련을 이긴 측면에서 동류의식을 느낀 듯하다.
▼우리사회 심각한 相剋현상▼
그는 2000여년 전통의 서양철학을 해체하자고 주장한 인물이다. “나와 남으로 구별되는 서양식 이분법(二分法)으로는 삶을 규명할 수 없다”면서 동양식 상생(相生)을 강조했다. 이 같은 해체주의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탈(脫)식민주의 등 숱한 현대사상 조류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水源池) 역할을 했다.
데리다 교수의 상생철학이 새삼 생각나는 것은 요즘 한국 사회가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심각한 상극(相剋) 현상을 빚기 때문이다. 지역간 갈등, 빈부 갈등, 세대간 갈등, 보혁 갈등, 언론사간 갈등, 강남-비(非)강남 갈등…. 가히 ‘갈등 백화점’이다.
물론 사람 사는 사회에 갈등이 어찌 없을 수 있으랴. 적정 수준의 갈등은 발전을 위한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 소용돌이치는 갈등은 위험 수위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집권층과 이들의 홍위병 성격 집단이 갈등을 교묘하게 조장해 이를 집권 에너지로 악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개혁’이란 그럴듯한 포장지로 겉을 장식하고 속내를 감추고서.
집권당이 17일 확정한 ‘4대 법안’도 갈등 일으키기를 작심하고 마련한 듯하다. 이들 법안에 반대하는 국민 다수의 여론은 안중에도 없고 소수 지지자들의 입맛만 고려한 것 아닌가. 3대 신문의 시장점유율을 제한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언론관계법은 권력을 비판하는 신문을 재갈 물리기 위해 만든 해괴한 법 아닌가. 공권력이 민성(民聲)을 억누르려 하니 독선, 독재, 국가주의, 전체주의 같은 단어가 연상되고 이런 분위기가 엄습해 오는 것 같다. 여러 독자가 좋아하는 신문이 판매부수가 많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는다는 것이 자유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민생이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 정부는 근본 해결책은 찾지 않고 여전히 경제난의 책임을 대기업, 언론, 외국 평가기관 등에 떠넘겨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장경제를 하겠다면 정부 기능을 줄이고 민간 기업 활동을 북돋워야 하는데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정부가 거액을 들여 추진할 ‘한국판 뉴딜정책’도 낭비성 사업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공무원을 늘려 대(對)국민 서비스 질도 높이고 일자리도 만들겠다고 하지만 민간인 위에 군림하는 ‘나으리’들을 양산하면 민생경제가 더욱 어려워진다.
차기 대통령 선거 때 경제난 원인을 개혁이 덜 된 탓으로 돌리고 개혁을 완성하기 위해 집권당 후보를 다시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경제를 방치할 수 있을까.
▼‘입장바꾸기’로 서로 이해를▼
교육분야에서도 그렇다. 대학입시 문제점이 고교 차별 논란으로 불거지더니 갈등의 진폭이 더욱 커지고 있다. 수험생들끼리, 고교와 대학 사이에서, 전교조와 교총 사이에서 반목이 두드러지고 있다. 난마처럼 얽혀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데리다 교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상대방 처지를 얼싸안는 ‘입장 바꾸기’를 실천해야 평화가 온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의 수첩에 한글로 써준 자기 이름을 받아들고 그는 “전생과 후생엔 한국인인지 모르겠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그는 한글날인 10월 9일 영면했다. 그의 명복을 빌며 이 땅에 상생의 뿌리가 내리길 기원한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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