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운 길에서 조심하라고 미리 알려 주는 것과 초만원인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외치는 것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환경운동에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환경오염을 줄이고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낙관적 환경주의다. 또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 자체에 대한 강한 반감과 미래 환경에 대한 어두운 비관론에 침윤된 극단적 환경주의다. 앞의 인용문에서 전자가 낙관적 환경주의라면 후자는 극단적 환경주의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에너지 및 자원 전공 명예교수인 저자는 물론 낙관적 환경주의자를 자처한다. 낙관적 환경주의자라는 표현은 언뜻 덴마크의 통계학자 비외른 롬보르의 유명한 저서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반대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둘은 극단적 환경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롬보르가 환경운동가들의 종말론적 주장이 어떻게 부풀려지고 왜곡됐는가를 폭로했다면 홀랜더는 “환경오염의 진짜 주범은 풍요가 아니라 빈곤”이라며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다.
많은 환경운동가는 환경오염이 산업화의 부산물이며 문명의 이기를 누리려는 현대적 삶의 방식이 쾌적한 삶의 터전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는 “당신과 나는 환경의 적이다”라는 죄책감이 스며 있다.
이 책은 그런 죄의식을 씻어준다. 그 성수(聖水)는 ‘U턴 이론’이다. 즉 산업문명 초기에는 사람들이 환경보다 경제성장을 더 중시하지만 경제성장을 통해 부와 기술이 축적되면 환경은 자연스럽게 개선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900∼1970년 미국의 연간 이산화황 배출량은 1000만t에서 3000만t으로 3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1972년 3200만t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산화황은 대기청정법 도입과 함께 1999년 1900만t으로 급감했다. 미세먼지의 총배출량도 1950년 1700만t에서 2003년 400만t으로 줄었다.
이를 두고 오염산업을 후진국으로 수출한 결과라는 반격이 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준비돼 있다.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산업시설 이동의 주된 동기는 환경규제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너지와 자원 소모를 줄여 생산효율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소비자를 찾아 나서기 위한 것이란 통계조사다. 또 이렇게 이동한 산업도 평균적으로 환경오염이 덜한 노동집약적 산업에 집중돼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약점은 이들 자료가 주로 세계무역기구(WTO)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대표적 부자국가클럽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환경문제는 가난”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이런 약점을 상쇄한다. 저자는 가난이 어떻게 기아와 식수오염, 질병, 자원 부족 등으로 환경을 파괴하는지 고발한다. 또한 중국과 인도 등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환경파괴도 진정한 환경개선을 위한 필요악으로 파악한다.
저자의 주장은 결국 산업문명을 죄악시하기에 앞서 가난한 이웃의 살림살이부터 먼저 살피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책이 환경재앙이라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나는 어쩔 수 없는 환경파괴자’라는 원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구원할 복음서일지, 아니면 인간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거부하도록 만들어 낙원에서 추방하게 만드는 선악과일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원제 ‘The Real Environmental Crisis’(2003년).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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