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 이 말처럼 우리를 황당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삶의 부조리’라고 일컬어지는 이 순간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질문만큼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문학적인 것도 없으리라.
이청준의 새 소설집 ‘꽃 지고 강물 흘러’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삶의 ‘아찔한’ 순간과 ‘어쩔 수 없는’ 순간, 그리고 이를 견디기 위한 유머에 대한 찬연한 이야기들로 메워져 있다. 이청준은 이전의 소설 ‘별을 보여 드립니다’ ‘소문의 벽’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해석학적 질문을 던져 놓고 있는 것이다.
단편 ‘오마니!’와 ‘꽃 지고 강물 흘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인간의 언어와 행동으로는 심성 깊은 곳에 내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까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밀함이란 결국 한순간에 드러나게 되고, 순간순간의 ‘아찔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라고 묻고 있기도 하다. 형수의 젖줄을 터 주기 위해서 젖문을 빨아야 했던 문예조씨의 사연(‘오마니!’)과 어머니를 구박하는 것 같았던 형수가 오히려 어머니를 잊지 않고 그 죽음을 등에 짊어지고 사는 모습(‘꽃 지고 강물 흘러’)은 꽃 지고 세월이 흐른 후 삶의 숙연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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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들꽃 씨앗 하나’와 ‘문턱’에 각각 등장하는 인물인 진성과 반형준은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무언가 결실을 볼 무렵, 시간의 문턱에 걸려 이를 놓치고 만 사람들이다. 그들의 ‘어쩔 수 없었던’ 내면의 상흔을 어떤 언어로 담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이들의 절대 경험을 어떤 것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열어 놓는다. 그리고 이제 무엇으로 이 아찔함과 어쩔 수 없음을 견딜 수 있을까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 놓는다.
단편 ‘무상하여라?’에 등장하는 인물은 야당 총재와 닮았다는 이유로 온갖 해프닝에 시달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를 즐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본과 모방하는 행위가 보여 주고 있는 거리, 이질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도 영원히 진짜처럼 남아 주기를 바라는 주변 사람들의 ‘유머’다.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권력자를 모방인물을 통해 일상으로 끌어내리고 함께 ‘논다’. 바로 그 순간 현실 조건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관철시키는 ‘쾌락’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가짜임이 밝혀지는 순간 서로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은 이 쾌락에 의해서 견딜 만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아라, 이것이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세계다. 그러나 애들 장난이지, 기껏해야 농담거리밖에 안 되는 애들 장난”(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애들 장난 같은 것,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것이 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일은 유쾌해지는 것, 유머러스해지는 것이며, 그것만이 삶의 불가해함을 견디는 마지막 성찰일지도 모른다. ‘꽃 지고 강물 흘러’가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가 아려 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성실 문학평론가·계간 ‘문학과 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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