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0년 남북통일축구 2차전

  • 입력 2004년 10월 22일 18시 40분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

그러나 아직도 6·25 총성의 잔향(殘響)이 메아리치는 한반도에서는 아니다.

1990년 10월 23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남북 국가대표간 통일축구 2차전이 열렸다.

46년을 끝으로 중단된 ‘경평(京平)축구’는 같은 달 11일 44년 만에 부활했다. 통일축구 1차전이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것.

1차전은 2-1로 북한 승리. 2차전은 1-0으로 한국이 승리했다. 3차전이 열리기까지는 12년이나 걸렸다. 2002년 9월 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통일축구는 0-0 무승부였다.

남북간 A매치(국가대표간 경기) 총 전적은 5승3무1패로 남측의 우세. 하지만 통일축구 3경기 종합전적은 1승1무1패에 골 득실까지 같다. ‘통일축구’라는 이름에 맞춰 연출이나 한 것처럼.

남측의 대북 포용정책은 한때 ‘퍼주기’란 비판까지 받았지만 축구에서는 북한이 늘 한국의 ‘디딤돌’이 돼 줬다.

‘세계 4강’ 신화를 처음 달성한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당초 한국은 아시아 예선 3위로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출전 자격을 따낸 북한은 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때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그라운드에서 난동을 부렸다. ‘2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의 중징계가 떨어졌다. 출전권은 한국에 넘어 왔다.

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전이 펼쳐진 93년 카타르 도하. 한국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마지막 상대인 북한을 3골 이상 차로 이기고, 일본은 이라크에 비기거나 져야 했다. ‘도하의 기적’은 이루어졌다.

남북통일은 요원해 보이지만 ‘축구통일’은 이루어지기도 했다. 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는 ‘코리아’란 이름의 남북단일팀이 출전해 8강 진출에 성공했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의 한국 대 이탈리아의 16강전. 붉은 악마가 펼친 카드섹션은 ‘AGAIN 1966’. 온 국민은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한 북한의 영광이 재연되길 빌었다. ‘꿈은 이루어졌다.’

같은 해 9월 통일축구. 6만4000여 관중이 외친 함성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통∼일조국!”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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