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88>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24일 18시 1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모두 갑주와 투구를 여미고 단단히 싸울 채비를 하라. 동서남북 어느 쪽이건 성문이 열리기만 하면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들이쳐 단번에 성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 같은 전횡(田橫)의 명령에 장졸들도 진작부터 싸울 채비를 갖추고 성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성양(城陽) 성안 백성들 가운데는 지난번 싸움 때 전영을 편들었다가 패왕 항우에게 부모형제를 잃거나 처자를 앗긴 사람이 많았다. 죽지 못해 초나라 군사들에게 눌려 지냈으나, 전횡이 성안으로 날려 보낸 글을 보자 더는 참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서로 모여 권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저마다 들고 일어나 성밖 전횡의 군사들에게 호응했다.

이경(二更)을 넘기면서 성안 후미진 곳부터 여기 저기 불길이 일기 시작하더니 삼경에 접어들 무렵에는 성안 곳곳이 대낮처럼 타올랐다. 초나라 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불을 지르는 자들을 잡으려 들었으나, 어둠 속인 데다 하도 여러 곳에서 불길이 솟아 군사만 성안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함성과 함께 허술한 서문 쪽이 먼저 열렸다.

서문 쪽에는 마침 전기(田旣)가 날랜 장정 수천과 함께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다. 이때를 놓치지 말라!”

“모두 성안으로! 어서 나머지 세 성문을 열어 전횡 장군을 안으로 모시자!”

전기의 군사들이 서문으로 뛰어들자 성안의 초나라라 군사들은 더욱 혼란되었다. 적이 서문으로 들어왔다는 말에 군사를 있는 대로 그쪽으로만 몰았다. 그러자 다른 성문들까지 느슨해지면서 다시 남문이 열리고, 이어 북문까지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전횡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홍수처럼 몰려들자 그러잖아도 머릿수가 턱없이 모자라던 초나라 군사들은 더 싸울 뜻이 없어졌다. 장졸들이 저마다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패왕이 세운 허수아비 왕은 아무도 돌봐줄 겨를이 없어 제왕(齊王) 전가(田假)는 그 난판에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성안 백성들의 호응 덕분에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성양을 떨어뜨린 전횡은 크게 기세가 올랐다. 사로잡은 초나라 군사들과 끝까지 그들에게 빌붙어 자기들에게 맞선 제나라 사람들을 모두 목 벤 뒤에 성양에 눌러앉아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널리 사람을 풀어 지난번 난리 통에 흩어진 형 전영(田榮)의 아들들을 찾아보게 했다.

전영의 아들들 가운데 맏이는 전광(田廣)이라 했는데, 일찍부터 왕재(王才)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횡의 군사들이 사방으로 수소문 한 지 며칠 안돼 그 전광이 어린 아우 하나와 성양에서 멀지 않은 민가에서 나왔다. 지난번 성양이 패왕에게 떨어졌을 때 초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옷을 갈아입고 농부들 사이에 숨어 지낸 끝이었다.

전횡은 몹시 기뻐하며 조카 전광을 새로운 제왕(齊王)으로 모셨다. 한(漢) 2년 4월 초순의 일이었다.

전광이 왕위에 오르자 패왕 항우에게 의연히 맞서다가 죽은 그 아비 전영에 향한 존숭과 신망이 자연스레 그에게 쏠렸다. 그가 있는 성양은 도읍처럼 되고, 제나라의 사람과 물자가 모두 그리로 몰렸다. 전횡은 다시 대장군이 되어 패왕과 맞서 싸울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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