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여의도의 ‘운동권 정치’

  • 입력 2004년 10월 24일 18시 44분


민주화 요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되던 1980년대 후반 사회부 사건팀 소속이었던 기자는 각종 시위와 분규를 취재하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양태를 현장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당시 사회변혁을 주도하던 범 운동권 세력은 점거 농성 시위 파업 유인물살포 대자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에 항거했다. 공안당국은 그들을 실정법 위반으로 엄격히 단속했지만 민주화로 나아가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민심이 운동권의 과격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명분을 지지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다. 10여년 전 최루탄과 화염병, 돌멩이가 난무하던 거리에서, 또는 공장에서 ‘가열찬 투쟁’을 부르짖던 투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 국정을 이끄는 중추세력이 됐다.

‘시국사범’ ‘수배자’ 등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당당히 사회의 주류에 진입한 그들에 대한 기대는 적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 희생을 감내하며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그들이기에 기성 정치인들보다는 책임감 있게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노라면 그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여권의 일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과거 운동권 시절의 논리와 시각, 행태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승복하기는커녕 헌재 결정이 부당하다고 따지는 것만 해도 그렇다. 행여 과거 그들에게 적용됐던 국가보안법, 집시법 등을 인정치 않고, 사법적 판단을 부정했던 것처럼 헌재 결정에 이의를 제기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과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또 여권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국보법 폐지를 위한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여론의 반대에도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밀어붙이는 모습은 조직의 노선에 따라 목표를 ‘쟁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고려치 않던 과거 일부 운동권의 부정적 행태를 연상시킨다.

남을 비판할 뿐 남의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투쟁을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삼고, 나만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등 일부 운동권이 보였던 독선과 배타의 오류를 현재의 여권 내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민심이 등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운동권이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도 균형감을 갖춘 사람이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원만히 국정을 이끌기 위해선 민주화 투쟁과는 다른 방식과 덕목이 필요하다는 점을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염두에 뒀으면 한다. 화해와 협력, 관용, 서두르지 않는 인내 등이 그것이다.

스포츠를 보자. 운동경기에서 유연성, 순발력, 완급의 조정, 판정에 대한 존중 등이 갖는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자신의 힘만을 믿고, 경직된 몸놀림으로, 룰을 외면한 채 펼치는 조급하고 거친 플레이는 관중의 야유를 받기 십상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개혁을 하려거든 낡은 운동권 문화부터 21세기에 맞게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이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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