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글은 일종의 발음기호와 같았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지 480여년이 지나도록 표기법 체계를 갖추지 못해 사람마다 소리 나는 대로 자음과 모음을 이어 붙일 뿐이었다.
일제강점기 소장 학자들은 ‘한글 바로 세우기’가 자주 국가를 준비하는 일임을 간파했다. 조선어학회를 결성한 이들은 총칼 없는 혁명을 모의했다.
1930년 이윤재 김윤경 이희승 최현배 이극로 등 12명은 혁명의 1단계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만들 것을 결의했다. 2단계는 표준말 제정, 3단계는 사전 편찬이었다. 문자의 규칙을 만들고, 내용을 담고, 용례(用例)를 갖추는 방대한 작업을 일개 학회가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3년간 125차례, 총 433시간의 회의가 열렸다. 표음(表音)과 표의(表意)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극로는 “의견 대립으로 의자를 던지고 퇴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 찾아가 민족을 위해 참으시라고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1933년 10월 29일 드디어 총 65항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발표됐다. 이 맞춤법은 낱말의 형태소(뜻을 가지는 최소 단위)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해 연음(連音) 표기의 혼란을 극복했다.
신문과 교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글 강습회를 열었다. ‘한글 붐’이 심상치 않자 일제는 동아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을 금지시키는 등 탄압에 나섰고, 이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학회는 난관에 굴하지 않고 1936년에 ‘표준말 모음’, 광복 후인 1947년에는 ‘큰사전’을 내놨다. 나라말의 기틀을 민간 모임이 확립한 전대미문의 업적이었다.
“이는 혼란하게 써오던 우리글을 정리하는 첫 시험일 뿐… 시대의 진보에 따라 한글도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많은 가르침이 있기 바란다.”
맞춤법 전문(前文)에 있는 말이다. 국적 불명의 언어로 한글이 오염된 지금, 후세를 깨우치는 죽비 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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