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2>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28일 18시 49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창칼 없이 싸울 수 없듯이 아니 먹고 걸친 것 없이 싸울 수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장수에게 한 갈래 군사를 떼어주어 남쪽에서 오는 군량과 물자를 보존하게 하십시오. 창읍(昌邑)까지만 내려가 기다리다가 호위해 오게 해도 초적(草賊)이나 잡군이 감히 우리 군량과 물자를 넘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범증이 다시 그렇게 패왕에게 권했다. 벌써부터 군사들이 주린 기색을 보이는 터라 패왕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종리매에게 3만 군사를 떼어주며 창읍에서 성양에 이르는 양도(糧道)를 지키게 했다.

전군을 고스란히 거느리고도 떨어뜨리지 못한 성인데, 거기서 다시 3만 군사를 떼어내고 나니 싸움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연일 성을 들이치기는 해도 초군의 기세는 무디어져 겨우 싸우는 흉내나 낼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패왕은 문득 자신이 지난날 거록(鉅鹿)을 포위하였던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 꼴이 난 것 같아 불길하였다. 왕리는 장함에게서 20만 대군을 받아 거록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일종의 보급선인 용도(甬道)를 지키기 위해 소각(蘇角)과 섭간(涉閒)에게 군사를 갈라주었다가 패왕 자신이 이끈 7만 군사에 대군이 차례로 무너져 마침내는 사로잡히는 치욕까지 당했다.

왕리의 선례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패왕은 더욱 거세게 장졸들을 몰아대었으나 늘어나는 것은 죽거나 다치는 군사들뿐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도착한 군량과 함께 다시 기막힌 소식이 들어왔다.

“한왕(漢王) 유방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마침내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하수(河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낙양 신성(新城)에 머물러 있는데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대왕께서 비워두신 우리 팽성을 엿보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늙은 도적놈이 스스로 목숨이 끊어지기를 재촉하는구나. 그런데 다섯 제후란 또 무엇이냐?”

“항복하거나 사로잡힌 왕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산왕(常山王) 장이, 위왕(魏王) 표, 한왕(韓王) 정창, 은왕(殷王) 사마앙, 하남왕(河南王) 신양을 이른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왕과 하남왕 대신 새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를 들기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이 있을 때마다 듣기는 하였으나, 다 모아놓고 보니 벌써 일곱이나 되는 제후들이 한왕 유방에게 넘어갔다는 게 새삼 패왕의 화를 돋우었다.

“그것들은 과인이 한번 서쪽으로 길을 잡으면 목 없는 귀신이 될 놈들이다. 제후라니 무슨 당찮은 소리냐!”

소식을 가지고 온 군사가 바로 그 다섯 제후나 되는 듯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치다 문득 목소리를 가다듬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았다. 유방 그 늙은 도적이 무슨 수작을 꾸미든 걱정할 것 없다. 모든 장졸은 동요하지 말라. 먼저 전횡을 사로잡아 그 가죽을 벗기고, 성양성을 허물어 평지를 만든 뒤에 서쪽으로 달려가도 늦지 않다. 먼저 간사한 토끼부터 잡고 살찐 사슴을 쫓으리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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