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간 시를 써 온 유안진 시인(63·사진)이 열두 번째 시집 ‘다보탑을 줍다’를 냈다. ‘여성적 삶’의 정체성이라는 화두는 이번에도 여전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생활의 갈피갈피마다 길어 올린 여성의 삶과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사회의 관계망도 짚었다.
‘가시나무는 제 몸의 가시가 싫었다/뽑아 버릴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그래서 최대한 가시나무이고자 했다/최선을 다했다/마침내 드디어 기어코 해냈다/가시나무만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의 꽃을/그러나 다들 장미라고 불러 버렸다/그러고는 잘라서 꽃병에 꽂아놓고 코를 벌름거린다/내가 나를 결정할 수 없는 여기를 세상이라고 한다/태어나 보니 딸이라고 했다/죽었다 살아나도 딸이 아닐 수 없어/최대한 딸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며느리가 되고 말았다/산 사람보다는 귀신들과 더 자주 밤새우는/제사상만 책임지는’(‘며느리’ 전문)
꽃병에 꽂힌 장미를 여성의 삶에 비유한 이 시에는 시인의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그것을 아우르는 해학의 공존이 엿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이 이른바 페미니즘적 시선과 거리가 있는 것은 여성적 삶을 거울로 삼은 ‘참 나’에 대한 거침없는 진술 때문이다.
‘한 눈 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 먹었는지/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내가 나의 감옥이다’ 전문)
시인은 한 사람의 여성 이전에 죽는 날까지 자아 찾기의 입구에 서서 탐구하고 방황하는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에는 이제 육십 줄로 접어든 시인이 털어놓는 생과 늙음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담겨 있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밤비뿐이랴/젊음도 사랑도 기회도/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어느 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비 가는 소리’ 중)
빗줄기 한 자락, 절집 추녀 끝 풍경 한 조각을 통해서도 소멸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보는 시인의 깊은 성찰은 길을 가다 주운 10원짜리 동전에서 착상한, 깨달음을 표현한 표제작 ‘다보탑…’에서 절정을 이룬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정신 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꺾어진 목 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그렇게 살아왔다가 그렇게 살아가리라’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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