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강석경씨(53)가 올해로 꼭 10년째 살고 있는 경주에서의 단상들을 기록한 수필집이다. 그는 8∼9월 인도의 자연주의 공동체 오로빌을 다녀오자마자 이 책을 펴냈다. 2000년 써낸 수필집 ‘능으로 가는 길’이 경주 곳곳의 고분들을 주된 화두로 삼았다면, 이번 책은 강씨가 폐허의 황룡사 터부터 벽 낙서 가득한 황오동 뒷골목까지를 소요하면서 눈에 비쳤던 풍정(風情)과 기억들을 쓸쓸하면서도 단아하게 그려 놓고 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산책한다. “야행성이라 작업하다가 창이 잉크빛으로 물들면 신성한 새벽하늘이 보고 싶어 홀린 듯 밖으로 나서곤 한다. 새벽안개가 풀밭에 깔려 고분들이 강 위에 떠 있는 무릉도원같이 보인다.” “인적 없는 빈 능원에서 나와 너(고양이)만 밤의 대기 속을 헤매니 우리는 친구가 아니냐.”
산책에서 보는 것은 일단 ‘신라’다. 강씨는 신라의 문화사(史)를 종횡으로 꿰고 있다.
![]() |
“(신라 원성왕릉인) 궤릉은 분위기가 자유롭다. 이란인과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무인상과 문인상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군에 있었던 서역인의 용맹성이 알려져서 그 상징으로 서역인이 능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고, 처용설화에서처럼 이국적 용모가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벽,피)邪)적 역할을 했듯이 이란인을 능의 수호자로 삼았다고 보기도 한다.”
“신원사 쪽을 바라보니 문득 비형이 떠오른다. 진지왕이 생전에 합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유부녀 도화녀와 맺어져 낳은 아들이 비형이다. 비형은 밤마다 천변에서 귀신을 데리고 놀았고, 왕의 명령으로 귀신들을 부려 하룻밤에 큰 다리도 놓았다는데, 조선조의 원한에 찬 귀신이 아니라, 사람도 돕고 함께 노는 신라 귀신이 귀엽기만 하다.”
그러나 이 수필집에서 정작 찬연하게 읽히는 것은 ‘경주’라는 천년의 공간 속에서 지나가는 자기 인생의 순간들을 잡아내는 그의 감성 어린 시선들이다. “석양의 하늘로 새떼가 날아가 장관인데 초겨울 솔숲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누런 솔잎과 낙엽 더미들, 군데군데 던져둔 억새와 넝쿨, 건초 더미가, 스러져 가는 광선에 까치집처럼 어수선하게 드러나 있다.” “언젠가 첨성대 뒤편을 산보하다가 나뭇잎 여기저기 붙어서 날개에 이슬을 얹고 잠자는 잠자리 무리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책장처럼 넘어가는 시간, ‘부생육기’를 읽은 내 젊은 날을 생각하니 이십여 년이 흐른 이 순간도 꿈인 듯 덧없다. 정말 긴긴 꿈을 꾼 것만 같네.”
스물세 편의 글이 실린 이 수필집은 맨 처음 “노곤하다고 생각했더니 봄이다”로 시작해 마지막 문장 “나의 여름도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로 끝난다. 강씨는 경주를 통해 결국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화가 김호연씨(동국대 미술학부 교수)가 경주를 그린 그윽하면서도 부드러운 삽화들이 글 읽는 동안 떠오르는 상상들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