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뒤틀린 권력’에 멍드는 나라

  • 입력 2004년 10월 31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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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心性)이 비비 꼬인 사람을 보는 것은 피곤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을 마구 해댄다. 자기 일은 시원찮으면서 주변에는 감 놔라 배 놔라 시비를 건다. 뭐가 잘 안 풀리면 남의 탓만 한다.

요즘 한국 사회는 ‘뒤틀린 권력’이 강요하는 집단적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다. 무능에 독선까지 겹친 집권세력이 나라의 에너지를 쓸데없는 방향으로 소모시킨다. 그 결과는 고달픈 민생, 추락하는 경제와 국가경쟁력, 불안한 안보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정권은 도덕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보자.

지난 대선 때 사기꾼을 내세워 야당 후보를 흠집 낸 ‘병풍(兵風)’을 비롯해 ‘안풍(安風)’ ‘북풍(北風)’이 모두 법원에서 어떤 결론이 났는가. 현 집권세력과 야당이 각각 제기한 의혹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거짓말이 많았는가. 권력을 잡자마자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을 왕따시키고 ‘대통령당(黨)’을 급조한 것은 또 어떤가. 야당도 문제가 많지만 기업에서 거둬들인 불법 정치자금 가운데 검찰이 밝혀낸 액수가 칼을 쥔 여당 쪽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게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한가.

동아일보에 대한 악의적 공격과 침소봉대에 대해서는 분노를 넘어 환멸과 서글픔마저 느낀다. 대통령과 총리를 비롯한 현 집권세력이 야당이나 재야 시절 동아일보는 민주화를 위해 어떤 신문이나 방송보다 지원하고 격려했다. 그들이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살아있는 권력’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였다.

오랜 역사에서 동아일보도 흠이 있을 것이다. 권력을 잡은 처지에서 섭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정권에서 권력과의 불화로 시달리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이 땅의 대표적 언론을 ‘역사의 반역자’로까지 매도하는 저 오만방자함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아무리 쉽게 어제를 잊는 세상이지만 최소한의 금도가 있는 법이다.

현 정권이 이른바 ‘개혁’이라며 밀어붙이는 각종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차갑다. 집권세력이 걸핏하면 정당성의 근거로 끌어들이는 1987년 6월 항쟁 때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던 넥타이부대와 학생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등을 돌렸다. 권위주의 정권 때도 찾아볼 수 없었던 총리의 막말이 ‘개혁과 진보’라고 한다면 그건 한국어에 대한 모독이다.

뒤틀린 권력의 만용이 불러온 정치사회적 갈등과 불확실성 증폭은 ‘시계(視界) 제로’의 경제를 더 짓누를 것이다. 내수 침체 속에 그나마 경제를 지탱해주었던 수출도 원화 가치 강세와 중국의 금리 인상, 국제유가 상승세와 세계경제 둔화 등 몰려오는 악재로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 적자재정과 연기금 동원을 통한 경기부양은 지금 분위기에서는 별 효과 없이 국민의 부담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정부여당이 국민의 구체적 삶의 향상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만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벌이는 ‘개혁 굿판’의 국가적 코스트는 어쩌면 이제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 시대의 권력이 지금 가는 길은 대한민국을 살리는 처방이 아니다. 인간세상의 복잡 미묘함에 눈을 감고 지성과 자유주의에 코웃음 치는 독선적 근본주의는 국민적 고통과 국가위상 추락만 불러온다. 한국의 앞날은 ‘개혁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의 잘못된 물줄기를 돌려놓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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