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외교사에는 스포츠와 동물이 종종 화해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미국과 중국이 1970년대 초 ‘핑퐁 외교’와 세계적 희귀 동물 ‘판다 선물’로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첼리스트 로스트 로포비치가 독일 통일 직후 허물어진 베를린장벽 앞에서 격정적으로 연주한 것과 1998년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북의 고향을 찾아간 목가적 풍경은 금세기 동서 및 남북 화해의 결정판으로 손색이 없다.
▷남북한 정상이 2000년 55년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화해의 상징으로 주고받은 선물은 진돗개와 풍산개였다. 엊그제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에서 출시한 첫 ‘메이드 인 개성’ 제품이 냄비라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접시에 음식을 각자 나눠 먹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은 한솥밥과 한냄비에 끓인 국을 함께 퍼 먹는 전통을 갖고 있다. 때문에 한국인에게 냄비는 단순한 ‘음식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가족애와 화합의 용기(容器)’인 것이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식구(食口)’는 한솥, 한냄비에서 나온 음식(食)을 같이 퍼 먹는 입(口)인 것이다.
▷출하 당일 남쪽으로 반출된 냄비 1000세트는 서울 한 백화점 특설매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실향민들이 주된 고객이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북에서 온 냄비는 ‘보통 그릇’이 아니라 ‘부모 형제의 유품 또는 손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서울깍쟁이’가 울고 간다는 ‘개성 깍쟁이’가 만든 제품이어서 더욱 신뢰가 간다. ‘개성 냄비’에 한민족의 진정(眞情)과 정성(精誠)을 버무려 남북간의 긴장이 해소되고 갈등 또한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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