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마라도…문명 해일에 잠을 깨다

  • 입력 2005년 1월 6일 16시 03분


폭풍주의보로 텅 빈 마라도 마라분교 앞 잔디밭. 하늘과 바다와 섬이 하나가 됐고, 빠르게 움직이던 문명화의 시계는 정지된 듯하다.
폭풍주의보로 텅 빈 마라도 마라분교 앞 잔디밭. 하늘과 바다와 섬이 하나가 됐고, 빠르게 움직이던 문명화의 시계는 정지된 듯하다.
마라도, 그곳은 단순한 섬이 아니다.

동경 126도 16분 36초, 북위 33도 06분 23초. 국토 최남단이라는 마라도의 지리적 위치는 섬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과거에는 거센 파도와 ‘돈이나 쌀보다 물이 귀한’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금(禁)섬’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한 해 20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휴대전화에서는 서울 친구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울려 대고, 등대 한쪽에 걸터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자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섬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기 위해 이 섬을 등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살기 위해 그들이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 있다. 과거와 미래, 최첨단 문명과 전통, 자연과 인간이 만나고 충돌하는 곳이 바로 마라도다. 이 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살아가고 있을까.

무성한 억새 숲 너머로 등대가 보인다. 등대는 1915년이후 섬 사람들의 오랜 친구이자 동반자로 존재해왔다. 강병기 기자

○ 가깝고도 먼 섬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10시. 제주도 남쪽 모슬포에서 유람선을 탔다. 뒤쪽 한라산에는 구름이 끼었지만 마라도 방향은 하늘과 바다가 온통 푸른색이다. 30분쯤 지났을까. 가파도가 보이고 그 옆에 항공모함을 닮은 섬이 나타났다. 마라도다.

제주 남제주군 대정읍 마라리. 남북으로 1300m, 동서로 500m. 약 10만평으로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의 두 배가 조금 넘는다. 걸어서 4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살레덕 나루터에서 이방인을 맞이한 것은 어묵과 커피를 파는 노점상이다. 매서운 바람과 높은 파도에 지친 사람들은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놀란 속을 달랜다. ‘마을차량’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2.5t 트럭도 서 있다.

마라도 관광은 1시간 반짜리 ‘번개 관광’이다. 규정상 유람선을 타면 정해진 시간 내에 배에 다시 타야 하고 섬에 머물려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섬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관광객들은 살레덕→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최남단비→장군바위→등대로 이어지는 일주 코스를 돌기 위해 종종걸음을 친다.

한때 이 좁은 섬에 ‘교통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게들마다 ‘번개 손님’을 잡기 위해 앞 다투어 차량을 마련하다 보니 섬 안의 차량이 18대까지 늘어났다. 물론 2m 남짓 되는 좁은 도로가 견딜 재간이 없었다. 결국 주민들은 2003년 8월 자가용 없는 섬을 만들기로 결의했고 지금은 마을 차량 2대만 사용하고 있다.

마라도는 과거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자급자족형에 가까웠다. 보리 조 콩 고구마를 재배했고 소와 말의 분뇨를 연료로 썼다.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했다. 그러다 1970년대 일본으로 소라를 수출하면서 마을 경제는 해녀들이 좌지우지하게 됐다.

1988년 여객선이 하루 1∼2번, 92년 유람선이 하루 4∼5번씩 관광객을 실어 나르면서 섬의 환경은 급속하게 변했다. 관광 수입을 겨냥해 외지인이 들어오고, 떠났던 섬사람들이 다시 U턴해 오면서 주민 수는 91년 63명에서 최근 95명으로 늘었다.

마라도를 연구해온 현혜경 씨(탐라문화연구소 연구원)는 “섬이 관광지가 되면서 농업, 어업에 기반한 전통적 공동체는 급격하게 해체됐다”며 “일부 해녀를 뺀 대다수 주민들에게 섬은 상업적인 일터가 됐다”고 밝혔다.

○ 국토 끝에서 자장면을 먹다

이곳의 ‘자장면 전쟁’은 관광지로 살아가는 섬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 개그맨이 등장한 CF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된 자장면 집은 민박, 횟집, 오토바이 대여, 기념품 판매 등을 제치고 가장 안정적인 장사다. 97년 첫 자장면 집이 생긴 뒤 한때 다섯 집까지 늘었다 지금은 두 집이 경쟁하고 있다. 자장면 집 안팎은 가게가 방송에 소개됐다는 간판과 손님들이 남기고 간 인사말로 도배돼 있다.

관광객들은 “우리나라 끝에서 자장면을 먹었다”며 의미를 부여하지만 마라도와 자장면은 아무래도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마라도는 기업과 종교 단체도 끌어들였다. 좁디좁은 섬이지만 교회 성당 사찰이 각각 ‘국토 최남단’이라는 수식어를 내걸고 들어서 있다. 종교시설 면적은 섬 전체의 4%나 된다. 성당은 1년 내내 거의 닫혀 있고 교회와 사찰의 등록 신자도 5, 6명에 불과하다.

뭍에서는 수십 년 걸린 변화가 이 섬에서는 몇 년도 걸리지 않았다. 기업들은 섬을 첨단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거나 시험하는 무대로 활용한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과 위성방송이 들어오고 휴대전화가 자유롭게 터지기 시작했다. 호젓한 섬의 모습은 사라지고 곳곳에서 도시풍경이 연출된다.

지난해에는 바닷물을 식수로 바꾸는 담수화 시설이 생겨 수돗물을 쓸 수 있게 됐고 내년에는 150kW급 태양광 발전소가 완공된다.

○ ‘섬의 원형’ 보존 움직임 싹터

이곳 사람들은 크게 원주민과 외지인으로 나뉜다. 비율은 반반 정도. 100명도 안되는 인구이지만 사람 사는 동네인지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예전과 같은 공동체적 연대감은 이제 사라진지 오래다. 섬이 상업화되는 과정에서 업종간 경쟁까지 치열해지면서 주민들끼리 낯을 붉히는 일도 적지 않다.

얼마 전 최남단비 쪽에 쓰레기 소각장이 생길 때만 해도 그랬다. 모두들 혐오시설을 집 가까이 두지 않겠다고 고집하다보니 주민들 간에 사이가 벌어져 서먹서먹해졌다. 관광지가 되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갈등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섬의 원형을 보존하자는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청년회를 중심으로 움직임이 있지만 각자의 입장이나 지역, 업종에 따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뜻을 모으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나마 섬의 전통적인 삶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이들은 10여 명의 ‘해녀 할머니’들이다. 여든의 나이에도 ‘물질’(해녀가 바다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하고 있는 마라도 최고령 해녀 라왈수 씨의 말.

“열 몇 살 때 물질 시작했지. 멋쟁이였던 영감은 이발관을 했는데 어찌나 놀기를 좋아하던지. 새끼들 안 굶기려고 바다로 들어갔지. 그래도 옛날이 살기 좋았어. 낚시꾼들이 많이 안 왔으면 좋겠어. 사람 손 타면 바다도 썩어. 소라 전복 따는 게 요즘엔 하늘의 별따기야.”

심장이 나빠져 깊은 바다에는 못 들어가고 쉬엄쉬엄 일한다는 할머니의 한 달 수입은 30만 원 정도였다.

전체 학생이 3명인 마라분교 김영일 군(11·3년)은 학년이 올라가면 본도로 가야 한다는 어머니 말에 “큰 학교로 가는 것도 좋지만 마라도에 계속 살고 싶어요. 마라도가 고향이거든요”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섬의 환경이 그래도 조금씩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공동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5년 전 타지에서 들어와 횟집과 민박집을 운영하는 최종환 씨(52)는 “섬이 빠르게 상업적으로 변해 주민 간에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말했다.

○ “새해 복 많이 받읍서”

지난해 12월 31일과 을유(乙酉)년 새해 첫날 마라도행 배는 폭풍주의보 때문에 유람선 운항이 전면 금지됐다. 중턱에 70cm나 눈이 쌓였다는 한라산이 저만치 보였지만 제주도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해가 지고 사람 소리가 끊긴 섬은 무섭다. 북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초속 15m의 강한 바람은 몸을 가누기도 힘들게 했다. 약간의 온도 차에 따라 비는 눈으로, 눈은 우박으로, 우박은 다시 비로 바뀐다. 가로등도 없다.

1월 1일 사나운 날씨 탓에 해돋이의 장관은 볼 수 없었지만 마을 경로당에서는 훈훈한 떡국 파티가 열렸다. 섬에 남은 마을 주민, 등대와 파출소 초소 식구들 30여 명이 모였다.

“새해 복 많이 받읍서.”

여기저기서 덕담이 오갔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춘광 씨(35) 가족은 아마도 마라도에 부는 새로운 바람들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8남매 중 막내인 김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 때문에 제주도로 갔다가 결혼과 함께 4년 전 섬에 들어왔다.

그는 “고향을 지키고 싶지만 교육 환경이 좋지 않다. 또 주민들 간에 경쟁이 심해져 마을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기반이 잡히면 다시 외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도 출신인 부인 김은영 씨(35)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했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희망이 자라고 있다. 떡국 먹고 세 살이 된 아들 영주는 마라도 최연소 주민이자 섬의 마스코트다. 초롱초롱한 눈에는 엄마 아빠의 근심은 들어 있지 않다. 언젠가 영주도 고향 마라도를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쯤 영주는 무슨 선택을 하게 될까?

마라도=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천연기념물… 환경특구…“제약 많아도 현재의 삶에 만족” ▼

주요 도시와의 거리를 표시한 마라분교 앞 이정표(왼쪽)와 관광객용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아저씨.

제주도개발특별법상 절대보전지역, 문화재보호법상 천연기념물, 자연공원법상 해양군립공원, 도서개발촉진법 도서, 지난해 12월 30일 ‘국토 최남단 청정 환경특구’ 지정.

마라도만큼 법률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지역도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은 지난해 말까지 12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서 자연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 섬 자체가 워낙 좁은 데다 살레덕 나루터 부근 공동화장실처럼 주변과 따로 노는 시설물들이 여기저기 솟아 있기 때문이다.

2001년 남제주군이 제주발전연구원에 의뢰한 프로젝트 ‘자연친화적 마라도 종합발전계획’은 마라도를 보호하는 발전 계획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섬 전체의 청정자원을 지키고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것. 이 계획에 따라 자동차 운행이 금지됐고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시설도 완공됐다. 내년 8월 태양광 발전소가 완공되면 기존 디젤 발전소는 퇴출될 예정이다. 섬의 특성을 살린 관광자원 확대를 위해 해녀전시관과 해양과학관도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있다.

생활 여건은 좋아졌지만 일부 주민은 섬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재산권 행사가 제한받는다며 불만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서로 땅을 팔겠다고 내놓고 있는 실정. 남제주군은 2003년 4652평, 2004년 5000여 평 등 절대보전지역의 사유지를 매입했지만 주민들이 팔고 싶어 하는 땅을 모두 소화하려면 아직 멀었다.

한편 지난해 30, 31일 섬에 있던 주민 40여 명 가운데 성인 25명을 일일이 만나 얼마나 만족하는지 취재했다. 만족도는 높지만 계속 살고 싶다는 대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마라도에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만족한다(18명)는 답변이 불만족스럽다(4명)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면 ‘계속 마라도에 살겠느냐’는 항목에서는 ‘계속 살겠다’(13명)가 ‘떠나겠다’(10명)보다 조금 많았다.

주민들은 마라도에 살면서 나쁜 점으로 ‘이웃간의 정이 부족하다’ ‘주민 교류가 적다’ 등 공동체의 유대감 부족(6명)과 교통 불편(5명)을 꼽았다. 문화-교육 기회 부족, 나쁜 날씨, 낮은 소득(이상 각 2명씩) 등 일반적인 어려움은 예상 밖으로 순위가 뒤로 밀려났다.

마라도=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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