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52>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7일 17시 5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여름 4월도 다해가는 무렵이라 낮은 길대로 길었다. 미시(未時) 무렵에 싸움이 벌어지고, 신시(申時)부터 쫓기기 시작해 두 시진 가까이 지났는데도 아직 날은 저물지 않고 있었다. 그 기나긴 여름 낮과 한왕의 때 아닌 감회가 다시 일을 냈다.

한왕과 서른 기(騎) 남짓의 패잔군이 아직도 소성(蕭城) 북쪽의 작은 구릉 사이에 넋을 놓고 늘어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동남쪽에 있는 작은 언덕을 돌아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얼마 전의 서북풍이 다 가라앉지 않아 반대편에서 오는 그들의 말발굽 소리를 미리 듣지 못한 듯했다.

한왕은 놀라 말등 위에 오르며 다가오는 군사들을 살펴보았다. 일려(一旅·500명)쯤 되는 기마대였는데, 멀리서도 초나라의 기치와 복색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한왕이 멀리 달아났을 것으로 여겨 보졸(步卒)은 두고 기마(騎馬)만으로 추격대를 편성한 듯했다.

“적이다! 모두 달아나라.”

한왕이 그렇게 외치며 앞서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북쪽으로 빠지는 길은 지세가 험해 한왕 일행은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앞서 달아나는 한왕의 귀에도 그새 다가온 적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나는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적장은 달아나지 말라. 어서 항복하여 우리 대왕께 목숨을 빌라.”

앞장 서 달려오던 초나라 장수가 그렇게 외치며 한왕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한왕이 펄쩍 뛰듯 돌아보니 적장이 어느새 긴 창을 쳐들어 힘차게 내지르고 있었다. 얼결에 몸을 비틀어 그 창날을 피한 한왕은 마지못해 검을 뽑아들었다. 그때 빗나간 창을 거둬들인 적장이 두 번째로 세차게 한왕을 찔러 왔다. 그 창날을 다시 칼로 튕겨내고 보니 비로소 한왕의 눈에 적장의 얼굴이 들어왔다.

적장은 설현(薛縣) 사람 정고(丁固)였다. 패왕이 손발처럼 부리는 계포의 외삼촌[모제]으로, 진작부터 패왕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왕은 사상(泗上)에서 정장(亭長) 노릇을 할 때 이미 정고를 알았다. 죽피관(竹皮冠)을 만들 대나무를 구하기 위해 구도(求盜·포졸)를 자주 설현으로 보내게 되면서 그 이름을 전해들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항량(項梁) 밑에서 패왕과 나란히 싸울 때 패왕의 부장(部將)이 된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사람됨이 너그럽고 어진 데가 있어 한왕은 그와 남달리 좋게 지냈다.

“정공(丁公), 정공. 잠깐만 멈추시오!”

한왕이 갑자기 칼을 거둬 물러나며 소리쳤다. 정고가 다시 한번 내지르려던 창을 멈추고 한왕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한왕을 알아본 눈치였다. 한왕이 그런 정고를 울 듯한 눈으로 마주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우리 모두 어진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서로를 고단하게 하는가!(兩賢豈相액哉)”

그 말에 정고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저만치 둘러서서 보고 있는 초나라 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하게 말했다.

“뒷날 오늘 일을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어서 가십시오.”

한왕은 그 말을 듣기 바쁘게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정고가 그런 한왕의 등 뒤로 길게 헛창질을 하다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스르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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