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영일만 유전’ 해프닝

  • 입력 2005년 1월 14일 18시 16분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도 끝나가고 있었다. 기자들은 기사를 어떤 형태로 정리할지 머릿속으로 서서히 ‘윤곽’을 그려보고 있었다. 일순간 한 기자의 질문에 기자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TV를 시청하던 국민도 마찬가지였다.

“항간에는 포항 지구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말이 퍼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통령의 입술 한쪽 끝이 보일 듯 말 듯 치켜 올라갔다.

“지난해 12월 초라고 기억되는데, 영일만 부근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성이 높을 만큼 충분한 양이 있는지 조사를 해보아야 합니다.”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TV를 시청하던 국민 중에는 펄쩍 뛰면서 ‘만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1976년 1월 15일, 온 나라를 한바탕 들었다 놓은 ‘석유 발견’의 흥분은 이렇게 시작됐다.

1973년 1차 ‘오일 쇼크’의 파고를 온몸으로 맞았던 경험이 뇌리에서 채 사라지기 전이었기에 감격은 더욱 컸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관이 가져온 원유를 들이켰다”는 등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국민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방송에서는 ‘제7광구’라는 가요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곧 나온다던 석유는 어떻게 됐는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때쯤인 같은 해 중반 경제당국은 “경제성이 없어 개발을 중단했다”고 짤막하게 발표했다.

당연히 국민의 실망은 컸다. ‘민심 이반을 무마하기 위한 조작극이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나 당시는 오히려 유신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시기였으며 정권이 위기의식을 가질 만한 현안은 없었다. 발표 그대로 극소량의 석유가 발견된 것이 사실의 전부였을까. 유신시대의 많은 비화가 밝혀지고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당시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증언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29년 후인 오늘날, 우리나라는 베트남 예멘 리비아 등 해외의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에 참여해 원유를 직접 확보하고 있다. 우리에게 한 세대 전 실망을 안겨주었던 동해 석유층은 2004년 11월부터 하루 1000t의 국내산 천연가스를 공급해주기 시작했다. 국내 하루 소비량의 2.2%에 불과한 양이지만 우리도 ‘산유국’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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