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9월 초 당시 외무부는 미국 일본 영국 유엔 등 재외 주요 공관에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가 없으면 한일관계는 ‘최악의 사태’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전문을 보내면서 이처럼 영문 표현에 대해 구체적 지침까지 내렸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범죄단체 조총련이 한국의 우방인 일본을 기지화한 중대한 사태’로 간주하고 있었다. 정부의 이런 인식은 일본과의 단교까지도 불사한다는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해 8월 15일 사건 발생 직후부터 정부는 “일본에 국가적 책임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8월 26일 노신영(盧信永) 외무부 차관은 우시로쿠 도라오 주한 일본대사와의 면담에서 “일본이 ‘국내법으로는 이번 사건에 관련된 조총련계를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운운하는 데 정부는 크게 분개하고 있고 국민감정이 험악해지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노 차관은 “최근 국회 외무위원회에서는 일본 측이 우리 국민감정을 자극하고 있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역사를 들춰 (일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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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8·15 저격사건 특별외교계획(안)’에 따르면 정부는 ‘학계에 의한 과거의 한일관계 및 명성황후 사건 연구’도 대일 전략의 하나로 검토했다. 그러나 일본은 ‘저격범 문세광의 단독 범행’을 한국 정부가 정치 외교적으로 과도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한국 정부가 국면 전환용으로 문세광 사건을 이용한다는 의구심도 적지 않았다.
일본의 기무라 도시오 외상은 8월 말 “한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은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발언으로 한국 측을 크게 자극했다.
9월 초 주일 한국대사관이 외무부 본부로 보낸 전문들은 ‘일본 특사의 한국 파견’을 둘러싼 치열한 신경전 양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한국 측은 “거물급 인사가 조총련 활동 규제 등의 내용을 담은, 일본 총리의 사죄 친서를 가져올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특사 파견은 사죄 사절이란 인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9월 13일 우시로쿠 일본 대사는 “한국 측의 친서 안을 그대로 수락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 내부 문서는 일본 측도 불행한 사태까지 각오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배짱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필립 하비브 미 국무부 차관보는 13, 14일 한국 측 인사들을 만나 “한국의 조총련 규제 요구는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결국 9월 19일 일본 특사인 시나 자민당 부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한 다나카 총리의 친서에는 ‘조총련 규제 내용’이 빠졌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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