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아폴로 1호 화재 참사

  • 입력 2005년 1월 26일 18시 06분


1967년 1월 27일,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소련 대사와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었다. 우주 개발의 국가간 평등을 보장하는 ‘외기권우주조약’을 타결지은 날이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최초의 인공위성)와 보스토크(최초의 유인우주선) 계획에 기가 죽었던 미국으로선 우주의 ‘선점 위협’을 방어한 셈이었다.

바로 그 순간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폴로가 불탔습니다.”

아폴로 1호는 공식 발진을 25일 앞둔 리허설에서 변을 당했다. 비행사 3명이 조종석에 탑승한 뒤 압축산소가 공급됐다. 4시간 후 산소 수치가 높다는 경보가 울렸다. 동시에 “불이야”라는 고함이 들려왔지만 해치는 열리지 않았다. 미국인 최초로 우주 유영을 한 화이트 소령, 머큐리 계획 창단 멤버인 그리솜 중령, 1800시간 제트기 조종 경력의 채피 소령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미항공우주국(NASA) 최초의 참사였다.

아폴로 계획은 미국의 야심작이었다. 머큐리와 제미니 계획의 성공으로 우주 비행에는 자신감을 얻은 터. 달에 먼저 사람을 보냄으로써 소련을 앞지르는 일만 남았었다. 더구나 베트남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던 존슨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대형 프로젝트를 독촉하던 중이었다.

이 사고로 아폴로 계획은 1년반 이상 중단됐다. 무인 실험만 계속하다가 1968년 10월에야 아폴로 7호가 사람을 싣고 우주를 날았고,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인류의 쾌거’로 기록된 아폴로 11호조차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달착륙선의 과부하가 문제됐지만 NASA는 발사를 강행했고, 귀환 때 남긴 연료는 단 15초분이었다. 달 착륙 후 복귀 대책도 미흡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그들은 구조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희생에 인류의 희망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애도문을 준비하기도 했다.

‘극적 실패’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한 아폴로 13호와 함께 아폴로 1호는 우주 탐험의 역사에서 숙연한 한 장을 점한다. 2003년 2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는 지구 귀환을 앞두고 ‘아폴로 1호의 희생을 애도한다’는 헌사를 띄웠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컬럼비아호는 대기권 진입 때 폭발해 또 하나의 비극을 기록했다.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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