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운동권의 시계는 멈추었나

  • 입력 2005년 1월 26일 18시 06분


전후(戰後) 청산에 관한 한 모범 사례로 꼽히는 독일은 지금도 재미(在美) 유대인 단체들의 끈질긴 추가 보상과 사죄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과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쏟아 부은 500억 달러가 넘는 배상금. 여기에 정치지도자들의 거듭된 통절한 사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미국 내 유대인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근본 이유는 바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망령(亡靈)’ 때문이다.

실제 독일은 미국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교역국이다. 방위산업 파트너로서 잠수함까지 함께 만든다. 이런 신뢰 때문에 나치의 상징이던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기념해 2000년에 이스라엘 현지에서 공연됐다.

문제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와 그 후예가 다수인 미국 내 유대인들의 ‘인식의 시계’만 1940년대에 멈춰 있다는 점이다. 특히 TV 프로그램과 영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 확대 재생산되는 홀로코스트의 비참한 기억은 이를 직접 겪지 않은 미국 내 유대사회의 젊은 층마저 강경으로 몰아간다. 유대계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했던 ‘쉰들러 리스트’도 사실은 이런 상황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체험은 당연히 인간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함께 두루 살피는 복안(複眼)의 시각을 유지하지 않으면 체험, 그중에서도 집단적 체험은 왕왕 미국 내 유대인들의 대(對)독일관처럼 현실과 유리돼 화석화되기 쉽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여권의 과거사 규명 작업과 다양한 형태의 ‘박정희(朴正熙) 때리기’의 바탕에는 민청학련 세대의 집단적 체험이 작용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386 운동권 세대의 반미(反美) 자주적인 의식의 바탕에는 ‘미국이 광주학살을 방조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민청학련 세대의 의식 속에 ‘독재자’로 자리 잡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금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 지도자로 꼽힌다. 따지고 보면 여권이 그렇게도 못마땅해 하는 ‘박정희 향수’를 초래한 원인은 ‘수구꼴통’ 집단의 여론조작이나 퇴행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다. 바로 박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국가관리 실패로 그의 과(過)보다 공(功)의 부분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통해 1980년대에 의식화 세례를 받았던 386 운동권 세대도 그렇다. 이 책들은 대부분 ‘미국에 냉전의 책임이 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동구권 붕괴 이후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자 수정주의자들은 자신의 학설을 뒤집었고, ‘북침설’을 주장했던 몇몇 학자들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386 운동권 세대가 갖고 있는 ‘반미숭중(崇中)’의 인식에는 여전히 수정주의적 상황인식이 깔려 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감출 수 없는 의문은 현실은 이미 앞서 달려가고 있는데, 혹시 민청학련 세대나 386 운동권 세대의 인식의 시계는 여전히 1970, 1980년대에 멈춰 있는 게 아니냐는 점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미래의 청사진’이지 ‘과거의 망령’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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